[시인의 詩 읽기] 술을 담가 나누던 사람

입력 : 2022-12-09 00:00

01010101401.20221209.900063170.05.jpg


술을 담글 때는 누구와 나눠 마시는 상상을 합니다. 여행지에서 괜히 술잔을 두어 개 사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술을 마시지 않은 건 혼자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제일 쓰다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술 마시는 일보다 술자리가 더 좋은 것은,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웬만하면 금세 분위기가 훈훈해진다는 데 있을 겁니다.

누군가의 시 속에 내가 등장하는 일이 있습니다. 시인들끼리 교류하다보면 나도 어느 시인에 대해 쓰기도 하고 어떤 시인도 나에 대해 쓰곤 합니다.

안현미 시인의 시 <훼미리주스병 포도주>에는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네요. 이 시를 읽고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여름, 안현미 시인과 포도농장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함께 얻어온 포도로 나는 술을 담갔고 그녀는 먹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술을 담그며 어떤 겨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마루에 서너 명이 둘러앉아 술을 음미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깊이 빠지는 풍경을요.

술은 맛있게 익어 이 시기를 놓치면 그 맛도 시큼해질 것 같은데 나는 그만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포도로 담근 술을 안현미 시인에게 건네주고 갔더랬습니다. “좋은 사람들하고 나눠 마셔요.” 남실남실 출렁이는 술병을 건네며 시인에게 그랬을 것입니다.

그 무렵 나는 이번 생에서 몇 안되는 아주 향기로운 여행을 갔었습니다. 이 지구가 처음인 듯, 우주복을 입고서 말입니다. 남미의 어느 포도밭에 도착해 포도를 수확하고 있는 부부를 만났을 때는 그들을 도와 또다시 포도주를 담가야 하나 잠시 고민도 했더랬습니다.
 

이병률 (시인)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