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핫플] ⑦ 경남 남해
수백년 자리 지킨 선구마을 빨래터
아낙네끼리 동질감 얻는 만남의 장
따듯·시원한 물 화수분처럼 ‘콸콸’
독일마을, 주황지붕·쪽빛바다 조화
파독 광부·간호사 정착 도우려 조성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도 곧 열려

바다 이름이 곧 지명인 곳이 있다. 비취색 바다에 크고 작은 섬이 수놓아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 경남 남해다. 남해를 가본 사람은 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여행하기 무척 까다롭다는 것을.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도 도로마다 멋진 드라이브 길이요, 걷는 곳마다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지니 어딜 가야 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전조사를 한 후 과감하게 첫 기착지를 정했다. 7월 중순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남면 ‘선구마을 빨래터’로 향했다.
새날을 가져다주는 마을 빨래터
토포필리아(Topophilia)! 인간과 특정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정서적 유대감을 뜻한다. 지금까지 실제 빨래터도, 그곳에서 빨래하는 아낙도 본 적 없다. 그렇지만 ‘빨래터’란 단어만 들어도 달보드레한 어머니 살냄새가 난다. 여전히 제 기능을 잃지 않은 남해 선구마을 빨래터에서 어쩌면 토포필리아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길 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여름날 오후 5시. 마을 중턱 2∼3㎡가량 돼 보이는 네모난 우물에서 걸레를 빨러 나왔다는 주민 금경화씨(65)가 이방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빨래터가 궁금해서 왔다고? 하이고, 볼 게 뭐 있다고요. 그래도 수백년 같은 자릴 지켜온 빨래터는 우리 마을 사람한텐 너무 소중하지예.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잖아요.”
문득 궁금했다. 강도 높은 가사노동에서 여성을 해방한 세탁기가 가가호호 있지 않은가? 4차산업혁명 시대 빨래터라니.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80대 할머니가 골목을 지나다 한마디 거든다. “이불 빨래 같은 거야 세탁기가 하지. 빨랫감이 얼마 되지 않으면 동네 빨래터로 가. 물도 공짜, 전기도 공짜 아이가.”
순환하는 자연은 넉넉하고 너그럽고, 옹색하지 않다. 빨래터에 사람이 몰려드는 까닭이다.
잠시 땀을 식히는 사이 투박한 화강암 질감의 박수근 그림 ‘빨래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과거 빨래터는 아낙네를 위한 만남의 장이었다. 규칙적인 빨래 방망이질 소리를 들으며 답답한 마음에 창을 냈을 것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아낙과 함께 시어머니·남편 흉을 보며 동질감이나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빨래터는 헌 오늘과 결별하고 새 내일을 준비하는 곳이기도 했다. 때가 씻겨 내려가고 옷감이 원래 색을 되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아낙의 삶, 아니 마을의 삶이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게 아닐는지.
빨래터가 꼭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우물 한편에 걸터앉은 배이동씨(77)도 수혜자다. “젊었을 땐 뼈 빠지게 농사일 끝내고 빨래터에 꼭 들렀다 아입니꺼. 시원한 물로 등목하고 나면 하루 피로가 싹 가셨으니 말이제.”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독일마을
남해 여행을 고려한다면 동선에 삼동면 물건리 독일마을을 빼놓으면 안된다. 해안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주황색 지붕과 쪽빛 바다가 절묘한 대조를 이루며 남해에서 가장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독일 전통음식을 판다는 안내판이 즐비하다. 독일 전통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도 이곳서 곧 열린다. 9월29일에서 10월3일 사이 방문하면 독일식 맥주를 마음껏 마셔볼 수 있다.
한반도 남쪽에 독일마을이라니 다소 생뚱맞다. 안옥희 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씩 이해가 간다.
“1960년대부터 당시 서독으로 건너간 간호사만 1만1000명, 광부는 8000명에 달해요. 그러면서 서독에 눌러앉은 사람이 많았죠. 이들의 국내 정착을 도우려 군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마을을 조성한 거랍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를 살릴 재원을 구하러 미국에 간다. 하지만 독재국가를 도우면 아시아 전역에 연쇄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며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래서 찾은 곳이 서독. 같은 해 12월 읍소를 거듭한 끝에 1억5000만마르크, 미국 돈으로는 3000만달러의 차관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빈국 한국에 지급보증을 해줄 은행이 하나도 없었다. 차관이 무산될 위기의 순간에 든 생각이 간호사·광부 파독이었다.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기상천외한 계획이 나온 것이다.
당시 독일에서 간호사와 광부는 인기가 없는 이른바 3D 직종이었다. 1000m가 넘는 깊이의 갱도에서 숨 쉬기조차 어려운 환경을 참아가며 광부는 석탄을 캐내야 했다. 간호사 역시 중증환자를 돌보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독일마을이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숙연해진다. 한끼 해결하기도 버거운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역만리 낯선 구라파 땅을 밟은 사람들…. 이들 노고를 양분 삼아 척박한 땅에 고속도로, 제철소, 자동차 공장이 들어섰다. ‘한강의 기적’ 그 서막이 오르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남해=이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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