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해법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말하기 어려운 희로애락이 있다. 심수봉도 그랬다. 웬만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고 버텨내 우리 곁에 와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서일까?
심수봉은 1955년 충남 서산 출신으로 상경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심한 두통을 유발하는 뇌신경 질병 탓에 학업을 중단했다. 이 병은 신경이 예민해져 소음을 듣지 않아야 했다. 전국을 떠돌다 인천 무의도에서 오랫동안 지냈는데 이때 재즈 피아노를 배웠고 이것이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가수가 될 때도 불운은 이어졌다. 나훈아와 1976년 ‘여자이니까’를 듀엣으로 녹음했는데 레코드사가 상업성이 없다며 발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심수봉의 도전은 이어졌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피아노를 치며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불러 뛰어난 연주실력과 가창을 선보였다. 결과는 탈락.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수상 여부를 두고 회의를 했는데, 너무 성인처럼 잘한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단다. 하지만 대중이 명곡을 못 알아볼까? 노래는 대성공했고 심수봉은 신예 대학생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던 1979년 10월26일 청와대 안가에 불려갔는데 그날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을 당했다. 이후 심수봉은 정보기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이듬해 재기를 노렸다.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에 배우로 출연하고 주제가 ‘순자의 가을’을 취입했다. 그가 작사·작곡한 주제가는 발표되자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제목에 영부인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것이다. 심수봉은 또다시 활동을 금지당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3년간 절치부심한 후 가사를 고쳐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란 제목으로 가수 방미에게 줬고 히트했다.
심수봉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재기에 성공했다. 나훈아와 첫 녹음을 하고 곡절 끝에 8년 만에 제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웬만한 가수라면 포기했을 난고의 시간이었다.
폭우가 고생을 시키더니 태풍이 다시 몰려와 농민들이 피해를 봤다. 도움이 필요한 때다. 옛말에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錄之人·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이 있다. 인간은 각자 먹고살 길이 있다는 뜻이다. 희망을 품고 심수봉의 인생 극복기와 함께 힘을 보태본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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