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이 높고 아름다워 일하다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의 풍족함과 아름다움 덕에 여름 동안의 폭염과 폭우·태풍이 할퀸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다. 그러다가 가을비가 또 며칠간 그칠 듯 말 듯 애를 태우며 계속 내렸다. 가만히 보면 봄부터 한동안 가물었다가 며칠간 비가 왕창 내리곤 했다.
종종 밭 옆을 지나는 동네 어르신들도, 다른 동네 농부님들도 “올해는 참 밑이 잘 안 들어”라거나 “수확할 게 없어”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 나도 가끔 올해는 참 힘들다는 말이 입 밖으로 툭 나왔다. 그러나 농부들 마음도 모르고 밤새 비는 내리고, 걱정은 끝없이 자라난다.
최근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며 무력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는데 이렇게 환경파괴에 대해 만성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을 ‘기후 우울증’이라고 한다. 기후위기로 미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나 과학자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증상이라고 한다. 기후변화를 제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농민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상기후로 농작물 피해 등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농민들 또한 기후 우울증을 많이 겪는다고 한다.
변해가는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농사법의 개발도 중요하고, 피해를 본 농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올해같이 폭우나 태풍으로 손쓸 겨를도 없이 피해를 본 농민들이 우울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지원 역시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농민의 안전이나 건강문제는 농기계·농기구에 의한 사고, 반복적인 작업에 의한 질환 등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농민들의 정신건강까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태풍으로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하듯이 기후 우울증도 특별취약직업을 선정해 지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와 남편도 주체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바라고 지역에 정착했지만, 농사와 농촌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점점 고민이 많아진다. 그저 개개인의 실천과 마음가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가 있다는 것, 해결책을 생각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모순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잦다. 농사를 짓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힘들어질 때도 있다. 농사일이 기쁨이 되거나, “재미가 있어서 농사를 짓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사회적 불합리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농민에게 가해지는 기후위기와 같은 압력을 상쇄시킬 수 있는 지원책이 생긴다면, 고된 농사일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계를 위한 고통스러운 삶의 노동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키우는 고행과 명상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농사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책이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의 많은 것이 바뀐다고. 하지만 개인의 마음이 이렇게 가벼워지기까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정화 (재미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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