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올해부터 10월15일을 ‘여성농업인의 날’로 정해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기념행사(18일)를 개최했다. 국내 대부분 달력에 기재되는 법정기념일을 갖게 된 이 땅의 100만 여성농업인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 달력을 넘기다가 자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 여성농업인!
‘여성농업인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것은 그동안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로 살아왔던 여성농업인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임이 틀림없다. 혹자는 11월11일 ‘농업인의 날’이 있는데 여성농업인만 따로 기념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여성은 농업인이라는 측면에서 남성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성농업인의 특성과 상황은 그저 ‘농업인’으로 묶어버리기에는 특수하고 예외적이다. 오래도록 지배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살아온 여성농업인은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일을 자기가 결정하는 ‘정체성 정치’가 필요하다.
제1회 여성농업인의 날을 기려 7개 여성농업인단체 대표들이 ‘대한민국 여성농업인 선언’을 공표했다. 일부 여성농업인단체 대표,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 농어촌여성정책특별위원회’의 여성농업인 소분과 위원들이 초안을 마련하고, 7개의 여성농업인단체가 동의한 이 선언은 여성농업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여성농업인 스스로 자신을 농업과 농촌이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주체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여성농업인들이 인류의 문명을 만들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농업이 경제적·사회적·환경적 삼중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시하고, 이 위기를 넘어 다음 세대에서도 존속할 수 있는 농업·농촌을 만드는 일이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확고하게 다짐하게 된다. 과거 여성농업인이 오로지 자기 앞의 농사에만 집중하거나 여성을 위한 정부사업의 수혜에만 관심 있는 것으로 보였다면 이제부터는 ‘식량 생산을 넘어 생명을 생산하고 공동체의 생존을 떠받치는 존재’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성장 중심 사고, 자본주의 방식, 가부장 문화가 더 심하게 생태계를 파괴하고, 더 지독하게 사람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더 극심하게 소득 양극화를 만드는 작금의 사회상을 꿰뚫어보고, 농사짓는 여성으로서 어떻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함께 누리는 좋은 삶’을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진보적이고 고매한 인간됨의 모범을 제시한 것이다.
선언문에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해서 평등하고 민주적인 농업·농촌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부터 생물다양성 보존,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 확보, 생태친화적인 농업 실천, 우리 종자 보존, 소비자와의 관계 증진, 건강한 먹거리 지역 자급, 그리고 미래세대의 희망과 전망을 위한 동반자이면서 지구공동체를 위한 세계 여성농업인과의 연대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이르는 10가지 행동지침이 있다. 거창하고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상’이 되지 않으면 인간이 속한 생태계가 생존하지 못할 것이므로 이 지침은 이상적이라기보다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현실적인 준비다. 또한 관계를 중시하고 과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던 여성농업인들에게는 특별한 각오가 요구되는 일도 아니다.
여성농업인들이여! 자연과 인간, 농촌과 도시, 여성과 남성, 농산물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고 이들과 연대해 생명을 키우고 나누며 먹거리를 복원하는 ‘참살이’의 주체이자 지구·국가·지역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당당한 ‘있는 존재’인 자신을 따뜻하게 안으시라.
김영란 (목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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