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일본 농협중앙회(JA전중)에서 임원들과 학자들이 농협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한 교수가 말했다.
“농협은 더이상 생산자단체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소비자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조합원이 되는 ‘산소(産消) 혼합형 협동조합’으로 진로를 바꿔야 합니다. 다소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제는 전향적으로 검토할 시기입니다.”
이 말에 농협 임원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공감을 표했다. 그때 처음 들었던 산소 혼합형 협동조합이란 용어가 요즘 다시 머릿속을 맴돈다. 현재 일본농협이 처한 상황과 우리의 처지가 참 비슷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현재 JA전중은 감사와 지도 기능을 모두 잃고 일반 사단법인으로 전락했다. 1990년만 해도 3600여개에 달했던 지역농협 숫자가 이제는 600개 정도에 불과하다. 영업이익 또한 3400억엔 수준을 유지하다가 30년이 지난 지금 1800억엔대로 급감했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농민 숫자 감소와 농촌의 쇠퇴, 그리고 도시의 점진적 팽창이 자리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15년 전 일본농협이 일부 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조합원이 되는 소위 산소 혼합형 협동조합으로 운영 패러다임을 바꿨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현재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위기상황을 제대로 읽고 좀더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일본농협을 보면서 우리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곡물자급률이 20%도 채 안되는 처지임에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여의도 면적 60배 규모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 농민도 급격히 줄고, 그나마 농촌을 지키고 있는 대다수는 고령층이다. 생산된 농산물마저도 제대로 팔지 못해 애태우기 일쑤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농업·농촌 문제들이 일본과 많이 닮았다.
그러잖아도 요즘 ‘소멸’이라는 단어가 ‘농촌’ 뒤에 붙어서 유쾌하지 못한 신조어가 탄생했다. ‘농촌소멸’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무서운 말이다. 농촌이 하루가 다르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위축돼가고 설상가상 농업 생산 기반마저 무너진다면 생산자단체인 농협은 어떻게 될까. 더는 설 곳도 없고 존립 의의마저 사라지게 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농촌소멸은 도시의 팽창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농촌농협이 힘들어지면 도시농협은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다소 억울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면 ‘협동조합 간 협동’ ‘도농상생’ 등의 무거운 말을 쓰지 않더라도 도시농협은 농촌농협을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고 당연한 이치다.
그럼에도 이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 농협은 과거 일본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지금 와서 후회하는 ‘산소 혼합형 협동조합’을 한번쯤 검토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농업 생산자와 농산물 소비자를 동일한 자격의 조합원으로 묶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선 농협의 외연이 넓어진다. 생산과 소비의 간격도 좁힐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농촌농협과 도시농협의 합병도 검토해볼 수 있다. 명실상부한 ‘국민의 농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일본과 한국은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다. 그리고 복잡다단한 정서가 항시 충돌하는 특수한 관계다. 그럼에도 한국은 일본의 발자취를 늘 따라 밟는다. 묘한 일이다. 그렇지만 한국농협만큼은 일본농협을 반면교사로 삼아 부디 저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송영조 (금정농협 조합장·농협중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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