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의학이야기] 혈압약을 먹어야 하는 이유

입력 : 2021-04-05 00:00

01010102201.20210405.900018418.05.jpg

고혈압인 줄 알면서 방심하다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불안’

심부전 등 예고 없이 일으켜 ‘조용한 살인자’라 불리기도

성인 29%, 1200만명 추정 꾸준히 수치 재고 약 복용을


내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안 건 한창 나이인 22세 때였다. 진료 동아리에서 혈압 재는 방법을 익히느라 서로의 혈압을 쟀는데, 지금 유행하는 간편한 전자혈압계가 나오기 전이라 자기 혈압을 모른 채 사는 이가 꽤 많은 시절이었다.

“160에 105? 야! 너 왜 이렇게 혈압이 높아?” 내 혈압을 재던 동료의 눈이 커졌다. ‘140(수축기)/90(이완기)’을 하나라도 넘으면 고혈압이라고 부르는데, 난 두기준 다 넉넉히 넘어서는 진짜 고혈압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혈압이라니! 놀란 마음에 병원에 외래진료를 예약했다.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혈압이 높아? 가족 중에 높은 사람이 있어요?” “아버지가 당뇨병이신데, 혈압약을 드시고 계세요.”

원래 혈압이 높을 때는 그 원인이 뭔지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인을 찾지 못하는데, 이를 ‘본태성 고혈압’이라고 부른다. 원인을 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되지만, 혈압이 높은 원인을 찾지 못하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래도 혈압이 높은 것은 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고, 자칫하면 갑자기 뇌혈관이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 억지로라도 혈압을 낮춰야 한다. 혈압약을 먹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약을 먹으면 당장 혈압은 낮아지지만, 근본적 원인이 제거되는 건 아니니 남은 생 동안 계속 복용해야 한다. 이게 싫어서 혈압이 높은 걸 알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의사가 처음부터 약을 권한 건 아니었다. 나이도 젊고 짠 음식을 덜 먹으면 혈압이 내려갈 수도 있으니 노력해보고 석달쯤 후 다시 혈압을 재자고 했다. 처음 며칠간은 소금을 덜 먹어봤지만 오래 못 가서 원래 식단으로 돌아갔고, 그 상태로 의사를 만나는 게 두려워 다음 외래진료에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20여년간 혈압에 대해 어떤 치료도 받은 적이 없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친절한 의사는 “혈압약, 당장 드셔야 합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난 그때마다 알았다고 한 뒤 조용히 내 갈 길을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없이 일하던 도중에 머리가 아파왔다. ‘어? 이거 혹시 혈압 때문인가?’ 다행히 두통은 다음날 가라앉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고혈압의 후유증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고혈압은 멀쩡한 사람을 갑자기 죽여 조용한 살인자라 불린다. 가장 흔한 방법은 심장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심장은 평소 혈관으로 혈액을 보내야 하는데, 혈관 압력이 높으면 심장이 혈액을 내보내는 게 매우 힘들어진다. 그 결과 심장이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심장 벽이 두꺼워진다. 그것도 어느 정도지, 계속 그렇게 일만 하면 지쳐서 쓰러지게 된다. 그게 바로 심부전이다.’ 이밖에도 뇌혈관을 터뜨린다든지, 신장을 망가뜨린다든지 등 고혈압은 인체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그러니 지난 20여년간 점점 타들어가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온 거다.

결국 난 40대 중반의 나이에 의사 앞에 앉게 됐다. 여러 종류의 혈압약을 섞어 드셔야 했던 아버지 때와는 달리 지금은 아침에 한알만 먹으면 되기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는 희망적인 말도 해줬다.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해서 평생 먹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체중을 빼면 혈압이 떨어지거든요. 지금보다 5㎏만 빼면 내가 책임지고 혈압약을 끊을 수 있게 해줄게요.” 그때부터 열심히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다이어트를 하면 할수록 체중이 더 늘어, 지금은 그때보다 5㎏이나 더 쪄버렸다.

혈압약을 끊는 건 아쉽게 좌절됐지만, 지금은 최소한 혈압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안심이다. 조금 늦긴 했지만 결국 혈압약을 먹음으로써 내 수명은 꽤 연장됐으리라.

의료계에 따르면 20세 이상 성인 중 29%, 약 1200만명이 고혈압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20·30대부터 혈압이 높은 환자는 127만명에 이르지만, 병원을 찾아 약을 먹는 경우는 14%에 불과하단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젊은 나이에 고혈압 환자가 돼 매일 약을 먹는 게 마땅하진 않으리라.

그래도 이건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40대 중반까지 별 탈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이며, 그 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혈압 재서 광명 찾자.’ 21세기에 외쳐야 할 구호다.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