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 어려워 쇠고기 못 먹던 때 돼지 간 통해 아시아조충 유행
사육환경 개선되며 태니아 급감 2012년 조사 땐 감염률 0.04%
요즘은 쇠고기로 민촌충 옮아도 위험성 낮고 치료 쉬워 걱정 뚝
“3~4㎝ 되는 물체가 항문으로 기어 나왔어요.” 항문이 가려웠던 A씨의 말이다. 형태가 직사각형인 것을 보면 음식물 같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움직였다! 약국에 가서 구충제를 먹었지만, 그 뒤에도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이 기생충의 이름은 태니아(Taenia spp.)다.
A씨의 몸속엔 길이 2~3m 되는 큰 기생충이 있는데, 온몸이 수없이 많은 마디로 이뤄져 있고, 그 마디 하나하나엔 알이 가득 차 있다. 기생충이 추구하는 목표는 자손 번식, 그래서 태니아는 그 마디를 하나씩 잘라서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워낙 얌전한 녀석이라 증상이 없다시피 하지만, 그 마디가 몸 밖으로 나갈 때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원래 태니아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갈고리촌충은 돼지고기를 덜 익혀 먹어서 걸리고, 민촌충은 쇠고기를 날로 먹으면 걸린다. 이 둘의 빈도는 1:20 정도로, 민촌충이 훨씬 많았다. 기생충학계에서는 이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쇠고기는 꿈도 못 꾸던 50여년 전, 민촌충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실제로 민촌충에 걸린 사람 중 상당수는 최근 몇년간 쇠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했고, 그중엔 평생 한번도 쇠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는 이도 있었다.
이 비밀을 푼 이는 충북대학교 교수 엄기선이었다. 그는 민촌충 환자가 나온 마을에 잠복하면서 그들이 평소 뭘 먹는지 관찰했다. 해답은 돼지 간에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소를 먹는 대신, 이따금 돼지를 잡아 간과 내장을 날로 먹었던 것이다.
엄 교수는 도축장으로 가서 돼지 간을 뒤졌다. 수만마리를 조사한 끝에 미지의 유충 몇마리를 찾아내 그걸 직접 삼킨 뒤 몸에서 키웠고, 석달 후 3m짜리 성충을 꺼냈다. 그 태니아는 민촌충과 비슷했지만,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몇군데 구별점이 있었다. 엄 교수는 이 기생충을 신종으로 발표했고, ‘아시아조충’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는 과거 환자들에게서 나온 태니아의 유전자(DNA)를 조사함으로써 이전에 민촌충이라 진단됐던 것들 대부분이 아시아조충이란 것도 추가로 밝혔다. 소를 먹기 어려운, 그래서 돼지 간과 내장을 날로 먹었던 시대였으니 아시아조충이 창궐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태니아는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1971년 전국민 조사에서 1.9%, 1981년에도 1.1%를 기록했지만 마지막 전국 조사가 이뤄진 2012년 태니아의 감염률은 0.04%에 불과했다. 유충이 사람 뇌를 침범해 간질 발작 등의 심한 증상을 일으키는 갈고리촌충이 가장 먼저 멸종했고, 돼지와 소가 보다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서 민촌충과 아시아조충도 시나브로 줄어들었다.
기생충학계의 태두이자 한국건강관리협회장인 채종일 선생은 2013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나라에서 이제 태니아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태니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질겨, 이따금 환자가 발생한다. 2013년 이후 내가 본 태니아 환자만 해도 무려 11명이고, 올해 7월 이후에만도 4명이 발생했다. 감염경로는 알 수 없지만, 태니아가 은연중에 유행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돼지 간이나 내장을 먹은 적이 있느냐고. “소 간은 먹은 적이 있지만, 돼지 간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걸린 건 아시아조충이 아닌, 민촌충이라는 얘기다. 이 둘을 구별하려면 전자현미경을 찍든지 아니면 DNA 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중 몇몇 샘플에 대해 DNA 검사를 시행한 결과 민촌충이 맞았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겠다. ‘가난해서 쇠고기를 먹지 못하던 시절, 사람들은 갈고리촌충과 아시아조충에 걸렸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소가 대중화된 지금, 사람들은 민촌충에 걸린다.’ 이게 과연 좋아진 거냐고? 당연하다. 갈고리촌충은 뇌 증상을 일으키지만, 민촌충은 거의 증상이 없다시피 하고 ‘프라지콴텔’이라는 약 한알만 먹으면 쉽게 치료되니까. 그러니 기생충이 걱정된다고 쇠고기 육회를 멀리하지 말자. 민촌충 때문에 포기하기엔 쇠고기 육회의 맛은 너무 좋으니 말이다.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서민씨는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과 교수로 있으며 <서민의 기생충열전>,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 > 등 수십여권의 책을 냈습니다. 일반인들이 알아두면 좋을 의학 관련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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