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뒤태만으로도 당당한 조선 여인상

입력 : 2022-04-15 00:00 수정 : 2022-04-1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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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의 ‘봄 캐는 여인(18세기, 종이에 담채, 27.6×21.2㎝, 간송미술문재단 소장)’

윤용 작품 속 ‘봄 캐는 여인’ 차림 야무지고 근골 옹골차

호미자루 꽉 그러잡은 모습 조선 농군다운 믿음성 풍겨

 

봄날의 들판을 돌아보라, 얼마나 수선스러운지. 아우성치는 햇살에 놀란 싹눈이 화들짝 기지개를 켠다. 맘 졸이다 얼굴 내밀던 연둣빛 잎사귀는 냉큼 반색한다.

냉이와 엉겅퀴는 또 무슨 수로 삼동 추위를 넘겼을까. 이 어린 것이 안간힘 쓰는 몸짓은 마냥 눈물겹다. 봄이 숨 차 오르는 기쁨이 아니라면 도무지 뭐겠는가. 옛 그림에 나온 봄인들 다를 바 없다. 배냇짓하는 생명이 화면에서 새근거리고, 이를 보듬으려는 화가의 붓은 살그머니 설렌다.

봄 구경하는 마음은 한결같을까. 그럴 리가 없단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화사하고 거나한 꽃놀이를 신명 나게 들려주다 어물쩍 청승맞은 봄맞이를 끄집어낸다. 원망 어린 눈으로 봄을 흘기는 여인이 어딘가 있다는 거다. 그 묘사가 글쟁이답다. ‘고운 아낙네가 바람난 낭군을 천리 먼 곳에 보낸 뒤 독수공방하면서 소식이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고, 흘러가는 물처럼 마음이 뒤숭숭하여 쌍쌍이 나는 제비를 바라보며 난간에 기대 눈물을 흘리는 것.’

옛적 봄날이 연출하는 정경이 이토록 겹겹이다. 활기 넘치는 답청(봄에 파릇한 풀밭을 밟음) 행차와 촛불 밝혀 밤새는 화전놀이는 떠들썩하고, 한숨 서린 봄의 넋두리는 돌연 구슬프다. 글에서든 그림에서든 하고많아서 번한 장면도 있다. 춘정에 겨워 싱숭생숭하거나 꽃 보자마자 눈물짓는 여인들 말이다.

지금 이 그림의 캐릭터는 어떤가. 달라도 생판 다른 이미지라서 새뜻하기만 하다. 속이 여려 낭창낭창한 청춘과는 아예 동떨어진 인물이다. 분내는커녕 흙내가 물씬 풍기는 농군의 아내가 아닌가. 고개 돌려 먼 데를 응시하는 저 주인공의 속내가 자못 궁금해진다.

제목 붙이자면, ‘봄 캐는 여인’이다. 시골 내음을 온몸으로 내뿜는 여인이 홀로 서 있다. 얼굴이 안 보여도 그녀는 골똘하게 살핀다. 옛 그림에서 뒷모양 여인은 드문 편이다. 아예 돌아서서 그럴까, 겉에 입은 일옷에 먼저 눈길이 간다.

선바람으로 나선 매무시인데, 차림이 뜯어볼수록 야무지다. 머리쓰개가 한눈에 맵자하다.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터번은 남들 눈에 쉽게 띈다. 뒤통수에 묶은 매듭이 도톰해서 멋 부린 티가 난다. 머릿수건은 호남지역의 향토 패션이라고 당대 문인은 증언했다.

어깨에 외줄이 보인다. 그녀의 숄더백은 짚으로 만든 망태기인데, 허리춤까지 드리웠다. 소맷부리는 팔뚝이 드러나도록 감아올렸다. 치마 주름이 흐트러진 것은 자락을 허리 위로 올려붙인 탓이다. 제 딴에는 무릎 굽히기가 편하게끔 손봤다.

흥미롭기는 살짝 드러난 속바지다. 양쪽 가랑이를 무릎께에 묶어 반바지 길이로 딱 맞췄다. 들메끈을 한 짚신, 호미 자루를 꽉 그러잡은 손아귀와 손등, 근골이 세찬 장딴지에서 농군다운 믿음성이 풍긴다. 눈여겨보라, 봄볕에 그을린 살갗이 좀 검실검실하고 옹골찬가.

그림 속에 쓰인 글씨 ‘군열(君悅)’은 선비화가 윤용의 자(字)다. 윤용은 조부인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본받아 묘사가 빼어난 이 그림을 남겼다. 서른 갓 넘겨 요절한 그였지만 집안 조카뻘인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나비의 수염과 분가루까지 그려내는’ 솜씨를 뽐냈다. 한가운데 인물을 배치하고 윗부분을 비운 그의 공간 미학은 여간내기를 넘어선다.

저 여인의 스타일은 일부러 부린 멋이 아니다. 모름지기 생업이 빚어낸 패션일 테다. 다시 보건대 ‘봄 캐는 여인’이 오죽 떳떳하고 우뚝한가. 꽃향기 따위에 겉 넘어갈 여심이 아니다. 감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발성과 독립성이 돋보이는 조선 여인의 자랑찬 본보기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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