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속화의 슬거운 맛을 잘 우려내는 화가가 김득신이다. 그의 붓에서 수두룩이 피어난 게 웃음기 머금은 시골 풍정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 오동나무에 걸린 보름달을 보고 느닷없이 검둥개가 짖어댄다. 가을걷이하랴 마당질하랴 사철 서두르는 농군들이 줄지어 나온다. 한뎃잠 늘어지게 자다 팔 뻗고 하품하는 배불뚝이 사내가 등장하고, 한여름에 짚신 삼는 가장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조손(祖孫) 가족까지 더불어 출연한다. 요약하자면 김득신이 그려낸 화첩은 조선 풍속의 갈라쇼(축하 공연)다.
그의 작품은 워낙 다정하다. 단원 김홍도와 겨룰 가작이 적잖다. 김득신의 솜씨는 집안 내림이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 화원 가문인 개성 김씨 일가로 아버지 김응리에 이어 동생 김석신과 김양신도 내리 족족 화원이 됐다. 큰아버지는 단원에게 영향을 미친 김응환이다. 어머니 집안도 화원 가문이라 외삼촌들이 다 이름난 화가였다. 열여덟살에 도화서에서 들어갔으니 될성부른 떡잎이던 그는 나중에 종삼품 벼슬도 얻어냈다.
김득신의 본령이 풍속화라면 풍자와 해학은 그의 붓질에 묻은 양념이다. 은근한 비틀기가 고스란히 스며든다. ‘양반과 상민’이라는 작품을 구경해보자. 한낮 들녘, 가지런히 작물이 늘어선 샛길이다. 그림 왼쪽에 일행이 보란 듯이 나타났다. 말을 타고 두건 끈 길게 늘어뜨린 양반이 앞쪽을 굽어보는데, 낯빛이 그저 무덤덤하다. 벙거지 쓰고 채찍을 든 앞쪽 경마잡이 사내도 눈을 내리깔았다. 말 뒤편 짐을 진 텁석부리는 갓이 뒤로 넘어져 보기에도 불량하다. 둘 다 말 아래서 양반을 보필하는 권솔이다.
정녕 딱하기는 이 양반네와 마주친 남녀다. 패랭이 차림 남자는 의지하던 지팡이까지 냅다 던져버리고 구십도, 아니 칠십도 각도로 허리를 꺾는다. 땅에 코를 들이박으며 허둥지둥하는 시늉이 안쓰럽다. 이 황망한 기색에 무슨 사연이 깃든 것일까. 곁에 전모를 쓰고 걸낭을 멘 여자도 따라서 머리를 숙인다. 양반이 마치 부처님이라도 되는 양 두손을 고이 모아 공대하는 자세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야 누가 봐도 뻔하다. 지체가 높다란 양반과 체신이 구겨진 상민 아닌가. 계급사회 속살이 이토록 적나라하기가 쉽지 않다.
남자의 처신은 공손을 넘어 보는 눈이 비참할 지경이다. 잠깐 더 살피면 다른 게 보인다. 여자는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 절한다. 남자는 어떤가. 말 앞을 막아서고 나서야 황급히 엎드리는 낌새다. 짐작건대 고을 원님 행차 길에 불쑥 뛰어들었다. 얼마나 복장 터질 일을 당했으면 저 모양으로 엎어지며 하소연하는 걸까. ‘죽여줍쇼’인지 ‘살려줍쇼’인지 모를 속사정이라도 끝내 씁쓸하다.
신분 하나로 갑질이 횡행하던 시대였으니 그림에 화가의 삐딱한 울분이 실렸다 한들 움찔할 지배층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어 굽신대는 사람이 생긴다. 걸핏하면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한다. <주역>에서 이미 했던 말이다.
“귀한 것이 천한 것 아래로 가라. 그래야 민심을 크게 얻는다(以貴下賤 大得民也·이귀하천 대득민야).”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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