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눈 속의 봄맞이가 하 그리 멀어도

입력 : 2022-01-21 00:00 수정 : 2022-01-2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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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파교심매도(1766년, 비단에 담채, 115.0×50.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려함 기피하던 시인 맹호연

입춘이면 행장꾸려 풍류 떠나 매화찾아 나귀타고 다리건너

조선화가 심사정 화폭에 담아 수줍은 꽃망울에 봄의 향기가

 

청나라 화가 이방응은 화려한 매화 그림이 싫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눈을 홀리는 게 마땅찮아서다. 타고난 ‘삐딱이’인 그는 마음잡고 붓을 쥐었다. 화폭 귀퉁이에 매화를 치고 시 하나 달랑 적은 뒤 나머지는 다 비웠다. 시는 이렇다. ‘눈에 들기는 가로 세로 천만떨기/ 마음에 남기는 그저 두세가닥.’ 그가 그린 매화는 몇낱의 가지만 달렸다. 이방응은 내내 우긴다. 매화꽃 천만떨기 요란해도 그림이 되는 꽃가지는 두어개뿐이란다.

눈 있는 이라면 봄이 꽃에서 오는 줄 안다. 그런들 지천으로 꽃 피어야 봄날인가. 속 깊은 옛 문인이 읊는다. ‘푸르고 가녀린 가지 위에 붉은 점 딱 하나/ 사람 마음 흔드는 봄빛은 많을 까닭이 없지.’ 시든 그림이든 가슴 설레는 풍치와 경치가 어련할까. 여름날 연잎에 구르는 빗방울이나 봄날 매화 가지에 달린 꽃잎은 많을수록 값싸다. 아껴야 시가 되고 덜어야 그림이 된다.

설 지나면 사흘거리로 입춘의 나날이다. 입춘이면 코가 석자인 사람 꼭 있다. 매화의 암향이 그리워 연신 벌름거리는 상춘객 말이다. 꽃구경도 시기가 맞아야지, 대한 지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안달이냐며 눈총 보내는 객꾼도 있겠다. 개중에 성급하기로 치면 저 그림 속 사내 따라갈 이가 드물 테다. 드리개로 치장한 나귀를 타고 재촉하며 다리를 건너는 이 길손이 과연 누굴까. 물어보나마나 당나라 전원시인으로 이름난 맹호연이 틀림없다.

그는 모자 끈 조이고 귀마개를 싸맸다. 외투까지 걸쳐 먼 길 치레가 야무지다. 멀리 높은 산에 눈이 첩첩이라 날은 아직까지 차갑다. 무얼 하자는 작정인가. 아지랑이는커녕 샛바람조차 먼데 그는 댓바람에 매화 찾으러 간단다. 우물에서 숭늉 내놓으라고 보채는 꼴이다. 진사시에 낙방하자 잰걸음으로 낙향한 맹호연은 세상 잡사에 등 돌렸다. 삭막함이 제 분수라고 여겨 고향집 사립문을 잠갔다. 그러고도 셀 성품이었다. 간밤에 비바람 치면 낙화가 몇닢이나 될지 걱정하고, 술친구 만나면 내내 뽕과 삼나무 기르는 얘기만 입에 올렸다.

맹호연에게도 좀이 쑤시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입춘! 책력에 나오는 절기는 늘 이르건만 그날이 행여 춘삼월이라도 되듯이 행장을 꾸린다. 오죽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 조선 초기부터 엔간한 소인묵객들이 맹호연의 풍류에 혹했을까. 이 고사(故事)에 맛들인 18세기 대표적 선비화가 심사정도 그예 붓 장단을 맞춘다. 산은 골골이 사느란 눈빛이요, 나무는 줄줄이 헐벗은 몸통이다. 눈 속의 봄맞이가 하 그리 멀다. 맹호연이 건넌 다리가 장안의 동쪽 ‘파교(灞橋)’이고, 매화를 찾는다 해서 제목에 ‘심매(尋梅)’가 들어갔다.

화들짝 핀 매화는 한닢만 날려도 봄이 줄어든다. 그림 속 꽃송이라고 허투루 피어내다가는 망친다. 아끼고 아낀 이방응의 매화꽃에서 귀티 난다. 맹호연이 애타게 찾은 설중매는 어떤가. 안 본들 봄이 아니 오련만 외가닥 매화는 겨울의 볼모에서 풀려나고픈 아우성이다. 한 소식은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들려준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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