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저문 날 길손은 인기척이 그립다

입력 : 2021-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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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이형록의 ‘겨울 주막(19세기, 종이에 담채, 28.2×38.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이형록 ‘겨울 주막’

붓끝이 조금 군색스럽지만 촌스러운 시골 모습 정겨워

날 저문 겨울 허기진 짐꾼이 주막 깃발 보자 한시름 놓고

주모도 기다렸다는 듯 반겨

 

눈 내리면 신나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와 강아지다. 치달리는 아이와 덩달아 뛰노는 강아지를 떠올려보라. 눈은, 뻔한 수사지만, ‘순수’의 상징이다. 눈 오는 날이 걱정인 사람도 있긴 있었다. 당나라 시인 나은이 별스러운 이유를 댄다. ‘눈 오자 풍년 들 징조라 하네/ 풍년 들면 다들 좋아지는가/ 장안에 가난한 사람들 여전한데/ 좋다 해도 말이 지나치면 안되지.’ 그의 시가 참 속정 깊다. 눈 쌓이면 헐벗고 주린 사람들이 힘들다. 눈 와서 풍년 든다는 말조차 가려서 하란다.

19세기 이형록이 그린 것으로 후대에 알려진 눈 온 날 그림을 보자. 이형록은 철종의 어진 제작에 참여한 본디 솜씨를 지녔고, 반듯반듯한 ‘책가도(冊架圖)’ 그림도 워낙 잘 그린 화원이었다. 책가도는 책꽂이를 주소재로 하되 문방사우를 비롯한 선비의 갖가지 애완용구가 등장하는, 이른바 책상물림들이 유난히 좋아한 양식이다. 그는 짜임새 있는 구도, 중후한 색채, 섬세한 표현 등을 자랑했지만 전해지는 작품수가 적다. 그나마 유작으로 ‘길 위의 인생’을 묘사한 몇점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오늘 보는 작품도 그중 하나다.

이 그림 <겨울 주막>은 붓끝이 좀 군색스러워 못마땅할지 모르겠다. 하여도 묘한 것이, 화폭에서 촌스러운 심성이 눈에 확 들어와 오로지 정겹다. 그림 속 소재 하나하나가 단박에 파악되는 구도가 새뜻하다. 시골의 참맛이 이럴 테다. 소박해서 꾸밀 까닭이 없고, 솔직해서 속내가 훤히 비치는 시골 아니던가. 그에 견주면 대처의 정나미는 다르다. 경우가 바른 대신 셈이 빨라 받은 만큼 준다. 시골 씀씀이는 오는 게 없어도 가는 게 먼저다.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깃발이 문간에 솟은 것으로 봐서 궁벽진 주막집이다. 술집을 알리는 표지가 깃대다. 요샛말로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다. 마당의 나무 낟가리에 눈이 쌓여 고깔 모양을 이루었다. 뒤란으로 돌아가니, 장독 뚜껑에도 눈이 소복하다. 삿갓을 쓴 짐꾼이 주막에 들어서는데, 굽은 등에서 벌써 허기가 느껴진다.

사람은 반죽 좋아 뵈는데 말은 먼 길에 지쳤다. 목이 타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가로 내처 달린다. 집 앞에 흐르는 냇물이 얼지 않은 게 그나마 고맙다. 일하던 주모가 고개 돌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낯빛을 띤다. 시골 검둥개는 덩치만 컸지 낯선 이를 봐도 짖지 않는다. 집주인 하는 대로 나그네를 수굿하게 맞는다. 날 저물면 과객은 인가가 그립다. 인기척이 들려야 모름지기 미덥다.

고려 문인 이숭인의 시 <신설(新雪)>에 나온다. ‘굶주린 까마귀는 들에서 울고/ 겨울 버들은 냇가에 가로 누웠네/ 어디쯤에야 사람 사는 집 있을까/ 멀리 숲에서 흰 연기 피어오르네.’ 그림 속 짐꾼도 눈발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주모가 말아주는 국밥 후루룩 비우고 아랫목 설설 끓는 봉놋방에 들어가 등을 지지면 고향 그리는 단꿈에 까무룩 젖어들겠지. 다만 남은 길이 고단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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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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