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가득 차서 노상 반갑고 초승달 이지러져 숫제 슬픈가 마음만 혼자 출렁이는 것 아닐까
‘달에 묻다’ 그린 왕실 출신 이정 대나무 그림 대가로 명성 높아 간략한 붓질에 소탈한 운치 담아
어스레한 새벽, 동녘에 뜬 달이 새초롬하다. 갸웃한 자태로 짐작건대, 음력 스무엿샛날이나 될까. 그믐달이다. 손 뻗으면 닿을 듯해도 달은 세상 밝히기에 턱없이 여리다. 알머리 드러낸 사내가 헤시시 반긴다. 그의 정체는 물어보나마나다. 속세를 떠나 산중에 사는 은자이거나 절집의 행자이려니. 무슨 등쌀에 못 이겨 꼭두새벽부터 나와 앉았을꼬.
저 맨발에 동저고릿바람은 간살부리지 않는다. 긴 소매 사이로 손 들어 달을 가리킬 뿐. 입가에 천연스러운 웃음이 번지는데, 심중은 다만 묘연할 따름이다. 새벽을 기다려 밤을 지새운 그는 행여 혼잣말로 되뇔까. ‘달아, 산이 높아 더디 떴느냐….’ 뜨고 지는 이치야 달인들 깨단하겠는가. 제 심정에 겨운 이들이 그 까닭을 달에 줄기차게 묻는다.
예부터 달을 노래한 시들은 열 수레에 실린다. 달마중을 부르는 익은말도 있다. 쳐다보면 ‘망월(望月)’, 함께 놀면 ‘완월(玩月)’, 물어보면 ‘문월(問月)’이다. 이를테면 댓바람에 나온 이런 시는 망월의 여흥일시 분명타. 조선의 송익필이 읊었다. ‘둥글지 않을 때는 늦게 둥근다며 탓하고/ 둥글고 난 뒤에는 어이 그리 일찍 저무는가/ 서른 날 밤 중에 둥글기는 딱 하룻밤/ 우리네 백년의 심사가 모두 이와 같더라.’ 차고 이지러지는 달이 수심을 일으킨다.
완월은 어떤가. 탐미적인 중국 시인 장약허는 달빛에 아예 젖은 채 노래한다. ‘강가에서 누가 처음 달을 보았고/ 강가의 달은 누구를 처음 비추었는가/ 인생은 대대로 끝이 없는데/ 강가의 달은 해마다 닮았구나/ 저 달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몰라도/ 다만 흘러가는 강을 바라다보네.’ 뜨고 지는 달은 그저 시간의 조화란다.
놀다보면 물음이 싹트기 마련이다. 이태백은 여간내기가 아니라서 문월이 한결 찰지다. 하늘에 달이 뜨고 물에 달이 비치고 잔에 술이 비자마자, 절창을 뽑는다. ‘오늘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해도/ 오늘 달은 일찍이 옛 사람을 비추었지/ 옛 사람 오늘 사람 물을 따라 흐르니/ 더불어 밝은 달 즐기기가 이와 같았네.’ 그는 절정에 이르자 명토를 박는다. ‘오로지 바라건대 술을 마시고 노래할 때/ 달빛이여, 금 술잔 바닥까지 길이 비춰주기를.’
이 그림 ‘달에 묻다’는 속된 음풍(吟風)이나 헤픈 농월(弄月)과 거리가 멀다. 시보다 선(禪)에 가깝다. 그린 이가 누군가 하니, 왕실 출신 이정이다. 윗대 할아버지가 세종대왕이다. 서른살에 ‘대나무 그림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였다. 그림에 성글고 거친 자취가 유독 두드러진다. 이정은 마음속에 품은 대나무 치는 솜씨로 은자의 옷자락을 묘사하고 바위의 형태를 남긴다. 간략하고 얽매이지 않는 붓질이 소탈한 운치를 부른다.
돌이켜보자. 보름달은 가득 차서 노상 반갑고, 초승달은 이지러져 숫제 슬픈가. 당나라 시인 이상은은 야멸치게 말한다. ‘초승달 이울었다고 쓸쓸해 하지만/ 둥근 달이라고 언제 유정하기나 했던가.’ 달은 흔적 없이 오가는데, 마음은 혼자 출렁거린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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