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 옛 그림 이야기] 깨어나렴, 갈 길이 멀단다

입력 : 2021-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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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노안도(1918년, 비단에 수묵담채, 158.5×69.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조선 말기 안중식 작품 ‘노안도’ 소슬한 가을밤, 기러기 세마리 

갈대밭 꾸물대는 두형제 깨워 먼 길 가려고 ‘끼룩끼룩’ 소란

노안, 음 같은 老安으로도 읽어 ‘노년에 편안히 지내라’는 뜻 담겨

 

처서 지나니 서늘바람이 분다. 해가 땅에서 멀어지고, 잎이 가지를 떠나고, 벌레가 수풀에 깃드는 때다. 날짐승과 길짐승은 겨우살이를 앞둔다. 철새도 재바르다. 식솔을 거느리고 높이 하늘을 나는 기러기 무리를 본 적 있는지. 그 모습이 가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옛사랑의 그림자와 겹친 듯, 시인 박목월은 구슬프게 읊는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조선 말기 화원 안중식이 그린 가을 그림을 보자. 제목이 ‘노안도(蘆雁圖)’인데, 노안은 ‘갈대’와 ‘기러기’를 뜻한다. 마침가락으로 기러기 떼가 나온다 하여도 헤어지는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살뜰한 느낌을 풍긴다. 소슬한 가을밤, 강물을 지나 늪이 나타났다. 휘영청 보름달이 갈대 위로 푸르른 달무리를 내뿜는다. 달빛 머금은 기러기 세마리가 내려오며 눈알을 부라린다. 활개 펼친 기러기는 ‘끼룩끼룩’ 소리치는 모양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수초 밭에 앉은 두 녀석을 보면 짐작이 간다. 고개를 치켜든 놈은 부르는 소리에 놀라 한발을 들고 막 날아오르려는 품새다. 또 한놈은 어떤가. 아무런 낌새가 없다. 쪼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외로 꼬았다. 이놈,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 이를 어쩌나. 가야 할 강남 길이 까마득히 먼데, 까무룩 잠에 빠졌으니 말이다. 꿈에서 헤매는 미련퉁이를 채근해서 데려가려는 기러기 큰형의 결곡한 속내가 선하다.

기러기의 날개를 묘사한 먹색은 짙고 연한 변화가 공교롭다. 갈대꽃에 묻은 하얀빛은 달무리가 번진 색깔일까. 스산한 가을 기운이 웬걸 부드레하다. 근대 화단에 이어진 안중식은 고종의 어진을 제작하는 솜씨를 자랑했다. 그의 스승이 오원 장승업이다. 그림에 공간적 실감을 부여하면서 대상의 사실성에 한발 더 나아간 역량은 스승보다 낫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그림도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붓질 덕에 서정성이 무르녹는다. 화가는 명나라 문인 이정미의 시를 빌려와 그림을 그린 사연에 빗댄다.

‘차가운 못에 구월 바람 쓸쓸하고/ 연꽃 지고 나니 갈대꽃 희구나/ 형제들 모여 참 다정하노니/ 함께 못에서 가을빛을 즐기네/ 천리 긴 하늘 운무 걷히면/ 둥지에서 서로 살기를 도모하지/ 날고 소리치고 먹고 자는 게 잘 맞으니/ 무리 떠나 다른 곳에는 가지 말기를’ 기러기는 먼 곳을 갈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우짖는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울음소리는 지친 짝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 추임새에 힘입어 강남땅에 닿는다.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그림은 ‘늙어서 편안하게 지내라’는 덕담과 닮았다. 갈대 ‘노(蘆)’는 늙을 ‘노(老)’ 자와, 기러기 ‘안(雁)’은 편안할 ‘안(安)’ 자와 발음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러기 행렬은 형제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될 만큼 다정하다. 형제를 일컫는 ‘안항(雁行)’이란 말의 유래다. 안중식의 ‘노안도’는 단짝이 곁을 지켜줘 미덥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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