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입력 : 2022-09-02 00:00

7월초 이사한 숙소 앞마당에

텃밭 만들고 상추 세이랑 심어

터 잡고 있던 고양이들 챙기고

작업실 오가며 강아지도 돌봐

생명과 연관…소홀할 수 없어

동식물 ‘기룬다’ 의미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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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 내게 지난여름은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군말’의 첫 문장과 같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여기서 ‘기루다’는 그리워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7월초 이사한 숙소 앞마당에 텃밭을 만들고 상추를 세이랑 심었다. 여름 상추는 햇볕에 타버리기 쉽고 풀에 덮이기 쉬우니 피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모종을 심은 후 보름 동안은 매일 물을 줬고 매주 밭을 맸다. 작업실에서 글을 쓰다가도 해가 이울기 시작하면 텃밭 생각부터 났다. 서둘러 퇴근해서 물을 주고 풀을 매면 밤이었다.

새벽에도 눈을 뜨자마자 텃밭부터 둘러봤다. 어제 다 매지 못한 풀이라도 뽑으려 앉으면, 아기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저만치 감나무 아래와 장독대·담벼락 위에서 고양이 세마리가 나타났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대를 이어 터를 잡은 고양이들이었다. 늘 이 시간에 아침을 먹었으니 새로 들어온 집사도 먹이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다음 날부터 나는 새벽마다 깨끗한 물과 함께 고양이들 끼니부터 챙기고 텃밭으로 향했다. 집을 비우는 날이면 새벽부터 죄짓는 기분이었다. 옆집 성당이든 뒷집 주조장이든 고양이들에게 너그러우니 내가 아니더라도 배를 곯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귀가하면 마당은 물론이고 지붕까지 살피며 고양이들을 찾았다.

밥순이가 낳은 강아지 네마리 가운데 한마리를 작업실과 숙소를 오가며 기르기로 했다. 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자 조선 후기 탁월한 광대인 ‘달문’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달문을 마당에서 키우기 위해 개집도 사고 사료도 넉넉하게 마련했다. 작업실에서 숙소까지 오가는 산책 연습도 시켰다. 숙소 앞마당으로 옮길 날을 정하고 나니 작업실에 앉아서도 뒤뜰 밥순이 곁에 다른 강아지들이랑 얌전히 있는 달문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태어난 지 두달이 지난 강아지가 엄마 곁을 떠나 홀로 마당에서 밤을 견딜 수 있을까.

기르는 대상이 느니 기루는 마음도 커졌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기도 했다. 장마가 시작되자 텃밭에 물을 줄 필요가 없어 다행이기도 했고 땅이 질퍽거려 밭을 맬 수 없어 걱정이기도 했다. 달문을 집으로 데려온 날엔 부딪침이 더했다. 낮에는 신나게 밭고랑을 달리며 놀았지만 밤이 들자 상황이 돌변했다. 첫 밤 내내 내가 곁을 지켰지만 달문은 고양이 그림자만 보고도 기겁해서 깨갱거리며 오줌을 지렸다. 고양이들이 달문을 위협하거나 공격한 것도 아니었다. 늘 하듯이 장독대와 담장과 지붕을 오갔는데 달문에겐 그 모습이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엄마인 밥순이 곁에서 서너달 더 담력을 키워 데려오기로 하고 작업실 뒤뜰로 옮겼다.

논과 텃밭과 정원을 오가며 벼와 상추와 야생화인 ‘꽃범의꼬리’를 기르고, 작업실과 숙소를 오가며 강아지 달문과 고양이 세마리를 챙기다보니 작년 여름보다 더 바삐 하루가 갔다.

책 읽고 글 쓰지 않는 시간에도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일들이 모두 생명과 연관되니 더더욱 소홀할 수 없었다.

추석을 보낸 뒤 ‘이야기 학교’를 시작한다. 벌써 네번째다. 10주 동안 수요일마다 곡성군민들과 함께 읽고 쓰는 과정이다. 동물과 식물을 ‘기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 여름에 알았으니 그 마음을 바탕으로 수강생들을 만나려 한다. 마을 이웃이기도 한 그들에게 가만히 물어보리라.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이 가장 기룬 대상은 무엇이냐고. 그 마음을 곡진하게 문장으로 고치고 또 고치면서 올가을도 참 깊어가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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