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충해 기승·영농비 급등에
중국산 국내시장 잠식까지
힘든데 돈은 안돼 포기 십상
수급에 따라 임시방편 대책
걱정하는 목소리조차 없어
현실 직시 대안찾기 나서야
요즘 농촌은 고추 수확이 한창이다. 2월초 씨앗을 뿌려 모종을 길러 4월말 본밭에 옮겨 심은 후 약 치고 김매며 가꿔 마침내 수확한 것이다. 우리도 600여포기를 심어 얼마 전 고추를 땄는데 병충해가 얼마나 심한지 성한 것이 3분의 1도 안된다. 아내가 고추를 따다 말고 “일손을 사서 수확하는 사람들은 울고 싶을 거라” 한다. 장마로 담배나방과 역병·탄저병 등이 기승을 부려 농약값이 부지기수로 들어간 데다 치솟은 인건비며 비료와 농자재값을 생각하면 어떻게 고추농사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고추는 고추장과 김치의 주된 원료일 뿐 아니라 우리 음식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될 양념이자 쌀 다음으로 중요한 농작물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추 재배면적은 1980년 13만3000㏊에서 2020년 3만1000㏊로, 생산량은 12만5000t에서 6만t으로 감소하고 재배농가도 158만6000가구에서 26만2000가구로 줄었다. 같은 기간 1인당 고추 소비량은 2.2㎏에서 2.8㎏으로 늘어나는데 생산이 감소한 것은 그만큼 수입이 늘었기 때문이다. 2020년 고추 수입량은 13만3000t으로 자급률은 겨우 30.2%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 식당에서 수입 김치를 내놓는다든지 고추장 원료로 수입 고추양념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사는 곳은 붉은 고추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붉은 단(丹)’ 자를 써서 단촌(丹村)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한 고추 산지였다. 시골에 내려온 직후 옛날 아버지가 하던 것처럼 고추농사나 지어보려고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는데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이제 고추는 끝났어요”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주산지인 단촌에서 고추농사가 안된다면 우리나라에서 고추산업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닌가? 문제가 있으면 앞장서 헤쳐나가야 할 공직자가 하는 말이라 내심 서운했다. 그 후 고추농사는 힘든 데 비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고추를 포기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고추장과 김치는 중국산 고추를 원료로 사용한다. 오죽하면 김치에 대한 지리적표시에 고추는 원산지를 따지지 말자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몇해 전 과학자들이 중국과 우리나라 고추 생산을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는 수확을 6회에 걸쳐 하는데 중국은 일시 수확해 노동 투입 시간이 한국의 45.4%에 불과한 데 반해 점적관수 시스템을 갖추고 초밀식 재배를 해 수확량은 우리보다 배 이상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한국국제농업개발학회지, 2019년). 더구나 한가구당 재배면적은 한국이 1176㎡(356평)인데 중국 농가는 1만4657㎡(4434평)∼2만2628㎡(6845평)이다. 중국의 재배·수확 기술과 경영규모에 기초한 생산 효율과 가격 경쟁력이 우리나라 고추산업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연구자와 공직자가 우리나라 고추산업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수급 사정에 따라 물가안정과 판촉행사 위주의 임시방편 대책을 거듭한 나머지 건고추는 물론 국산 원료로 만든 고추장이며 김치까지 사라지는데도 대책은 고사하고 걱정하는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고추를 포기할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생산 기반 조성과 기계화는 물론 신품종 개발, 경영비 절감을 위한 공동 육묘와 방제, 맛의 표준화와 고부가가치 식품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요란한 말잔치와 보여주기식 이벤트보다 고추농사를 포기하는 절박한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농가의 소득원이자 일자리는 물론 우리 고유의 식문화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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