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전체 면적중 16.6%만 정비 비 안오면 농작물 수급 불안정
식량안보·밥상물가 안정 위해 농업 생산기반 장기 투자 필수
밭 형태·토양 등 기초자료 확립 저수지 등 활용·관리 점검 필요
지나가는 비가 잠시 왔지만 농사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기반 정비가 안된 밭에서는 물 부족의 심각성이 더하다. 며칠 전 콩을 심으려 로터리를 치는데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 가뭄에 싹이 틀지 걱정이다. 겨울가뭄 끝에 아직 비다운 비가 오지 않으니 4년 전 밭에 심은 나무 수천그루가 말라죽었다. 옛날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조차 자기 허물로 여겼다는데 흙에 묻혀 사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가뭄 탓이라며 농산물 가격이 들썩인다. 며칠 전 농산물 유통정보에 따르면 감자 20㎏은 도매가격이 3만8120원, 양파 15㎏은 1만7840원으로 전년보다 57%·96.6%가 올랐다. 밭작물의 수급이 불안정하고 가격이 널뛰는 가장 큰 원인은 생산기반이 취약해 자연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건국초부터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져 농업 생산기반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 논은 경지정리율 64.7%, 수리안전답률 83%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게 됐다. 하지만 밭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기반 정비사업을 시작해 2020년까지 전체 밭 면적의 16.6%인 12만3000㏊를 정비했다. 따로 통계가 없으니 수리안전밭 비율도 그 정도일 거라 추정할 뿐이다. 저조한 밭 기반 정비는 기계와 물의 이용을 제한하기 때문에 같은 면적에 노동 투입시간은 논보다 10배 이상 필요하고 가뭄이 들어도 하늘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이젠 밭 농업의 기반 정비와 기계화에 관심을 둘 때다. 그동안 쌀산업 위주 농정을 추진한 결과 경지 이용은 물론 생산액·소득에서 쌀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했다. 하지만 쌀 소비가 줄어들면서 1990년대 이후 재배면적과 농작물 수입 가운데 미곡 수입 비중이 절반으로 줄었다. 과거 밭을 논으로 바꾸던 관행마저 역전되고 있다. 농경지 가운데 밭 면적은 1970년 44.6%에서 1990년에는 36.2%까지 줄었지만 2020년엔 다시 47.3%로 늘었다. 농가소득은 물론 국민경제 측면에서 밭농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여름배추는 강원 대관령 고랭지에서 생산되는데 추석 물가의 가늠자로 인식돼 장마나 가뭄이 들면 고위공무원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2015년에만 세차례나 이 일대를 다녀온 필자는 안반데기에 다단 양수시설과 저수조를 갖추고 송급수관로를 설치해 배추밭에 물을 공급했다. ‘농업농촌부문 가뭄대응종합대책’을 세우고 사방댐 설치 등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지난해 가을엔 그 동네 이장과 주민 몇분이 배추를 들고 경북 의성군 단촌면까지 찾아와 “이젠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는다”고 좋아하셨다. 그렇다. 식량안보며 밥상물가 안정은 농업 생산기반 정비에서 시작된다.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계획과 장기간에 걸친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체 수원 개발 등 범정부대책을 추진한다고 한다. 먼저 저수지와 관정 등 수리시설 설치와 이용 실태를 파악하고 그간 발표한 정부대책의 추진 상황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하면 어떨까? 기후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지역과 작물에 따라 관개방법이 다르고 기술도 변하기 때문에 보완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일이 밭 형태와 토양, 농기계와 물 이용 실태 등 기초 자료를 확립하고 밭농사 기반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막대한 예산으로 전담기관까지 운영하면서 밭 경지정리율이나 용수 이용 통계조차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차제에 지방으로 이양한 기반 정비사업을 포함, 저수지며 관정 등은 어떻게 활용되고 관리되는지도 점검해보자. 식량안보는 말로 되는 것도, 멀리서 찾을 일도 아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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