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 가능성 없는 농정공약 남발 나라 미래 걱정보다 표 놓고 거래
예로부터 국가 차원서 농업 중시 더불어 사는 농부 삶 기본 삼아
농산물 수급·식품위생·안전 등 국민 애로 해결하는 역할 다해야
우수와 경칩에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데 아직까지 날씨가 차다. 엊그제가 정월대보름이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농사에 들어갈 때다. 한달 넘게 병상에 계시던 어머니도 봄이 오는 걸 아시는지 날 좀 풀리면 비닐하우스에 상추며 쑥갓 등 채소 씨앗을 뿌리겠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90세 노인이 단돈 몇천원이면 살 수 있는 상추를 이렇게 직접 키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지만 사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촌로의 지혜가 숨어 있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으로서 내 손으로 직접 지어야 한다는 직업적 소명을 넘어 건강한 농산물을 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책임감이 담겨 있다. 게다가 우리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환산 불가능한 농업가치의 소중함도 알고 있어서다.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농업예산과 공익직불금을 크게 올리고 청년농민 육성이며 기본소득 지급, 식량자급률 제고 등을 위한 약속을 했다. 더러 귀가 솔깃한 내용도 있지만 대개는 알맹이가 빈 경우가 많다. 당선 후에는 시치미를 뚝 떼인 선심공약을 겪어본 농민들이 최근 후보자 서명까지 들어간 플래카드 구호에 이번에는 좀 달라질지 기대하는 바도 있다. 다만 공약 실천 비용을 부담해야 할 납세자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할지 모를 일이다. 특히 나라 장래를 걱정하는 고민보다 표를 놓고 거래를 하는 듯해서 실천의지가 있는지 의문시된다.
국가 차원에서 농업을 중시하고 장려한 역사는 오래됐다. 중국 춘추시대 민요 등 시를 모아 엮은 <시경(詩經)>에 ‘일월에 쟁기 손질하고 이월에 밭 가는데, 아내가 자식들과 남쪽 비탈밭으로 밥을 날라 오면 권농(勸農)이 매우 기뻐하네(빈풍칠월)’란 문장이 있다. 여기서 권농은 농업을 장려하는 명을 받은 관리를 말한다. <서경(書經)>에도 ‘군자는 제 한몸 편하기보다 백성들의 생업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무일 편)’는 글이 있다. 둘 다 주나라 통치자가 된 어린 조카에게 주공(周公)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먼저 백성들 생활을 이해하고 힘껏 권농을 실천하라는 내용이다.
농업에 대한 지도자의 철학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신라시대부터 임금은 신농(神農)에게 제사를 올리고 풍년을 기원했다. 세종대왕은 주공의 조언을 ‘빈풍칠월도’란 병풍으로 만들어 가까운 곳에 두고 항상 농민들의 어려움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삼으니 농업은 의식(衣食)의 근원이자 왕정의 바탕’이라는 ‘권농교문’을 반포했다. 정조 임금도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며, 백성의 하늘은 농업’이라며 24년 재위기간 중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정월마다 농사를 잘 지을 것을 당부하는 ‘권농윤음’을 반포했다. 이들 지도자들의 농업철학은 단순히 땅의 이익만을 챙기기보다는 근면·성실하게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문화를 지키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사꾼의 마음을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4차산업을 꿈꾸는 마당에 옛날이야기를 꺼내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월은 변했지만 국가 경영의 이치는 동일하다. 국민 삶과 애환을 깊이 이해하고 한정된 자원으로 당면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남다른 철학과 비전, 신념을 가진 지도자와 이를 믿고 함께하는 국민동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후보자들이 하나같이 농업을 생명산업이자 국가 기반산업으로 여긴다니 다행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의 백년대계를 마련하고 잘못된 제도와 추진체계, 일하는 방식을 과감하게 고친다면 선진국으로 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요즘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이 왕이다. 국민이 걱정하는 문제, 즉 농업분야에서는 농산물 수급불안과 식품위생, 안전, 농촌환경 및 경관보존 등을 해결하기 위해 온전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의 공감을 얻고 농업환경과 소비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더해가는 일, 즉 이게 바로 존경받는 농업을 통한 유익함을 가져온다는 이경흥농(以敬興農)의 지름길 아닌가. 한 지역농협이 이를 ‘경(敬)의 농업’으로 삼아 적극 실천하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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