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농부는 육종학자

입력 : 202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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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생물학자다. 특히 육종 전문가다. 지구에 살던 인류가 농업을 발명한 후 농부들은 밀과 쌀 같은 식물을 키우고 야생 소·돼지까지 길들인다.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고 그것을 새로운 품종으로 만드는 일을 육종이라 부른다.

과거 육종의 가장 큰 목적은 생산성이었지만 요즘은 맛이다. 사람들이 배고픔에서 벗어나자 조금 더 맛있는 먹거리를 원하니 육종 방향도 품질 향상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우리 식탁에 많이 오르는 포도일 듯하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급 주종인 와인을 빚는 데도 제격이다. 그런 포도가 19세기 중반 ‘필록세라’라고 불리는 진딧물 때문에 초토화할 뻔한 적이 있었다.

유라시아에서 경작되는 포도는 대부분 유럽포도(Vitis vinifera)로 수천년간 꺾꽂이로 번식을 해온 탓에 조금씩 모양과 맛이 다를 뿐 같은 종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식물학·원예학이 성행하면서 식민지 식물을 수집하는 붐이 일었고 북미 자생종인 콩코드포도(Vitis labrusca)도 들어온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포도뿌리혹벌레, 일명 필록세라가 함께 따라온 것이다. 몸길이 1㎜인 노란색 진딧물인 포도뿌리혹벌레는 유럽포도의 뿌리를 공격해 수액을 빨아 먹고 그 결과 포도나무는 뿌리에 혹이 생기고 수액 공급이 끊기면서 말라비틀어져 죽는다.

1863년 프랑스 남부에서 첫 감염 사례가 보고된 이래 프랑스 전역에 파죽지세로 퍼졌고 뒤이어 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 포도농장을 덮쳤다. 프랑스 정부는 30만프랑(현재 가치로 60억원)을 걸고 필록세라 퇴치법을 공모했지만 당시 생물학 수준으로는 묘책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해결방법은 단순한 데 있었다. 필록세라에 감염돼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북미산 포도나무를 대목으로 쓰고 유럽포도를 접수로 사용해 접붙이기 한 것이다.

전통적 육종법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농민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이 방법을 사용한 농가들이 성공을 거두자 1881년 보르도에서 열린 회의에서 필록세라 퇴치법으로 공인했다. 이로써 1900년 프랑스 포도나무의 3분의 2가 위는 유럽포도, 아래는 북미 포도로 이뤄진 키메라(유전적으로 다른 유형의 세포가 두개 이상 혼합된 식물) 나무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필록세라는 살아남았고 전세계 와인용 포도농가 99%가 이런 방법을 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육종의 단순화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수한 품종을 얻었다고 그것만 키우면 결국 유전적인 다양성을 잃고 한번에 몰살되는 종말적인 위험을 안고 살게 된다. 매년 되풀이되는 조류인플루엔자(AI)도 마찬가지다. 우리 농가에서 기르는 닭은 유전적으로 100% 같다. 한 개체가 감염돼 죽으면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AI는 변형이 많고 닭의 생애주기가 짧아 백신도 소용없다. 유일한 대안이라면 밀집 사육을 지양하고 AI에 내성이 있는 닭을 육종해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머피가 그랬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우리 농민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상엽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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