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 뒤 기온이 뚝 떨어졌다. 들판엔 벼가 여물어 가을걷이하는 손들이 분주하고, 산색도 엷은 단풍빛을 띠기 시작한다. 들에서 골짜기에서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은 곧 산자락에도 타오르리라. 소농이지만 나도 들깨며 콩이며 수확을 해야 하고, 해마다 이맘때면 하는 일이지만 낡은 한옥 수리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겨우살이 준비엔 땔감 구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땔나무 일부는 구해놨지만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아, 볕이 따뜻해진 오후에 손수레를 끌고 가까운 야산으로 향했다. 기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여태 내 팔과 다리 힘으로 밀고 가는 손수레를 사용한다. 산 밑에 도착해 낫과 톱과 밧줄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숲에는 벌목한 후 버려진 잡목들이 많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냥 두면 다 썩어버릴 나무들. 굵은 나무들은 톱으로 잘라서 산 아래로 굴리고, 잔가지들은 모아서 밧줄로 묶어 끌고 내려왔다. 산 아래 모인 나무들을 손수레에 싣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데 흐뭇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시절에 땔감처럼 필수적인 것을 손수 내 힘으로 해결하는 기쁨은 누려보지 못한 이들은 모를 것이다.
집에 도착해 손수레에 싣고 온 나무들을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개어 처마 밑에 쌓아놓자 해가 꼴깍 저물었다. 쪽마루에 앉아 구슬땀을 닦으며 작은 탑처럼 쌓인 땔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내가 나와 엄지를 치켜세운다. “나무를 보니 든든하네요. 부자라도 된 것처럼….”
저녁을 달게 먹고 나왔는데 아내가 꼬드긴다. “달이 휘영청 밝으니 모처럼 달구경 좀 나서볼까요?” 창밖으로 내다보니 달이 찢어질 듯 밝다. 날씨가 쌀쌀해 두툼한 옷을 꺼내 입고 들길로 나서자 달빛이 내려와 팔짱을 껴준다.
농로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동무 삼아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 내려다보니 촌로들이 많이 사는 마을엔 불빛이 드물다. 모두들 일찍 잠자리에 든 모양이다. 달빛만 고고하다. 문득 저 값없는 선물이 정말 귀하다는 느낌.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달빛이 아니던가. 중국 대문호 소동파는 저 달빛을 두고 ‘무진장’이라고 노래했지.
“저 강상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느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이것을 취해도 금지할 이 없고 아무리 써도 고갈됨이 없으니,
이것이 조물주(造物主)의 무진장이로다.” <적벽부>
조물주의 ‘무진장’이란 말은 ‘다함이 없이 많다’는 뜻과 함께 ‘덕이 넓어 끝이 없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일찍이 이것을 깨달은 소동파는 대자연을 다함이 없는 스승으로 받들고 살았다. 평생 올곧게 살고자 했던 소동파가 숱한 유배와 가난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후세의 존경을 받는 대문호로 기억되는 건 아무리 써도 고갈됨이 없는 바람과 밝은 달의 ‘무진장’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가슴 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
달빛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요즘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상사로 뒤숭숭한 마음이 한결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달빛 비치는 별서(別墅)에서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자리에 들면 깊은 단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진하 (시인·야생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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