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무시무시한 태풍들이 지나갔음에도 벼농사는 대풍이다. 그런데 기쁘고 즐거워야 할 풍년이 농촌에서는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이미 정부가 사들인 쌀 재고량도 넘치는데 공급이 크게 늘다보니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쌀 소비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식량작물 중 자급이 가능한 것은 사실상 쌀뿐이다. 1970년대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린 혼식이 기본이었는데, 어머니는 주로 기장이나 조를 넣고 밥을 하셨다. 물론 양을 늘리려는 방편이었지만, 밥을 좀 더 다양하고 맛있게 먹기 위해 여러 곡물을 함께 넣고 밥을 지었다고 좋게 생각해 본다.
최근 우리 민족의 농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논문이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세 학문의 교차 연구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의 농경에 의한 확산을 지지한다’라는 긴 제목의 논문은 9000년 전 동북의 서요하 지역에서 최초로 기장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한국어 화자들의 조상이라고 밝힌다.
서쪽에 밀농사를 짓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었다면 동쪽에는 기장농사를 짓던 요하 문명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쓰던 말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동북아시아인 공통의 조상 언어로 추측하고 있다. 이 조상어가 5000년 전쯤 분기해 투르크어·몽골어·퉁구스어로 갈라지고, 유사한 한국어·일본어 화자들이 차츰 동남진해서 기장 농사법을 가지고 한반도로 유입됐다. 일본어 화자들이 먼저 한반도로 내려가 벼농사를 짓던 토착민들과 혼합되고, 이어 한국어 화자들이 남하하면서 밀려난 일본어 화자들이 바다 건너 일본 열도로 들어간 야요이인이다. 이는 고고학 유적 조사와 유전자 분석이 뒷받침되면서 아주 그럴듯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밥과 언어가 하나돼 이동하고 정착하며 수를 늘려 번창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됐든 우리는 조상 덕분에 기장과 쌀이 멋진 조합을 이룬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땅에서 살며 한국어를 하지만 먹는 밥의 종류는 달라졌다. 최근 한국인이 하루에 먹는 밥은 한공기 반이 채 안된다. 쌀을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 오곡을 섞는다고 해도 연간 개인 소비량은 60㎏ 정도다. 그에 비해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밀 소비량은 나날이 급상승해 연간 32㎏에 달한다. 아마도 세기말쯤 되면 밀이 주식이 되고 오곡은 가끔 생각날 때 사서 먹는 부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 밥이 달라졌으니 언어도 변할까? 사실 우리말에 외래어와 차용어는 차고 넘친다. 국수는 누들, 메밀국수는 소바, 부엌은 키친, 간편식은 밀키트가 된다. 이런 단어들은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언어의 변화는 인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환경이 변하면 언어도 자연스럽게 진화한다. 그리고 언어가 밥을 바꾼다. 사이공이란 단어를 들으면 ‘퍼(쌀국수)’가 생각나고, 무뚝뚝한 영국인을 떠올리면 ‘피쉬앤칩스(생선튀김과 감자튀김)’ 냄새가 난다.
그럼 우리 밥에는 어떤 언어가 따라다닐까? ‘탄수화물 덩어리’ ‘혈당’ ‘잡곡밥은 맛없음…’ 이런 것들 아닐까? 우리 밥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농민들에게 그 대가를 돌려줄 긍정의 언어가 필요하다.
이상엽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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