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늦잠을 깨우는 관리사무소 안내방송. 왠지 정감 없는 음색과 어색한 억양은 단잠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어려서부터 아파트에 살아온 나는 관리사무소 소장님의 구수한 안내방송이 그립다. 고향 마을 이장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잠을 깨우는 미안함이 깃든 그분들의 음성은 그래도 정겨웠다. 그들의 안내방송은 기계음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방송 뉴스도 인공지능(AI) 앵커로 진행 가능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끔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우리는 연예인과 경쟁해왔지만 자네는 AI와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우스개 진심을 전하기도 한다.
신조하 작가의 단편소설 <인간의 대리인>은 많은 일이 AI로 대체된 미래 시대 이야기다. 주인공은 뇌가 없는 변호사다. 임신 중에 태아의 무뇌증을 발견한 의사는 투명한 인공 뇌로 이식을 권유하고, 부모는 받아들인다. 교육자인 부모는 아들의 생물학적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타고난 교육열로 아들을 변호사로 만든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시민단체 등은 공감 능력이 없는 기계 인간에게 변호권을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헌법재판소는 변호사 자격을 인정한다. 이미 법정의 판사는 AI 판사로 바뀐 지 오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을 받아줄 법무법인은 없었다. 군법무관으로 20년을 일하다가 테러 소탕 작전에서 부상으로 팔과 다리를 잃은 후 제대한 변호사가 운영하는 작은 법인에서 일하게 된다. 대표는 주인공이 마치 AI라도 장착한 똑똑한 변호사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그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시험도 가까스로 합격한 평범한 변호사였다. AI 수준의 지식력과 공감 능력은 없었으나 특이한 부작용으로 타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변호사는 제약회사의 치매 치료약 임상실험 부작용으로 좀비가 된 피해자의 변호인으로 나서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들과 피해자 가족의 생각을 헤아리고 AI 판사의 특성을 잘 반영해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 좀비가 된 피해자들에게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사망에 이르게 해달라는 원고 측 주장과 피해자의 회복을 기대하며 지속적인 치료를 강행해 그들이 원하는 실험을 계속하려는 피고 측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최근 미국의 전기자동차 제조업체가 인간형 로봇을 공개했다. 시속 8㎞로 걷고, 식물에 물을 주고, 공장 단순노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영화 속에서 이미 친숙해진 로봇에 비해 기능이 미흡해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전기자동차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영화처럼 단순노동이나 인간을 정서적으로 지치게 하는 돌봄노동, 심지어 방송노동까지 대체 가능하다고 해도 사실 100세까지 살게 되면 법정에서마저 인간의 대리인으로 나서는 로봇을 보게 될까 걱정이다. 그렇게 되면 요즘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고리대금업자에게 억울한 피해를 본 신용불량자나 과거 행동으로 오해받는 전과자를 변호해줄 따뜻한 변호인들이 사라질까 봐 염려된다. 그래도 아직 인간형 로봇의 기능이 미흡하다고 하니 안심이다. 과학기술이 영화 속 상상력을 따라가기에는 버거운 모양이다.
김재원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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