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은 나이가 드니 빨간색이 좋아진다지만 나는 나이 들어갈수록 담백하고 심심한 맛이 좋아진다. 음식도 그렇고 말이나 옷차림, 심지어 사람도 그렇다.
과거엔 과도하게 간이 센 음식을 선호했다. 비빔냉면에 고추장과 겨자를 마구 뿌리고 서양음식에도 타바스코나 칠리소스를 쳐 혀가 얼얼해져야 만족했다. 향신료를 좋아해 주변에서 내 위장은 무쇠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화장이나 옷도 예전 사진을 보면 다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강렬한 원색 옷에 액세서리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글이나 말도 적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 자극적인 단어나 촌철살인 표현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하루아침에 기호와 취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커피 한스푼에 설탕 두스푼 그리고 우유까지 타 먹던 다방 커피 대신 흔히 말하는 아메리카노 즉 원두커피를 마신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쓰기만 한 커피가 음미할수록 고소하기도 하고 과일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엔 함흥식 비빔냉면에서 평양식 물냉면으로 개종(?)했다. 좋아하던 한 어르신이 냉면은 면보다 육수가 생명이라며 식초도 겨자도 넣지 않은 평양냉면 육수의 세계를 내게 맛보여주신 덕분이다. 그 후 유명한 냉면집을 순방한 결과 가장 심심하고 담백한 육수를 만드는 곳을 찾았다. 냉면만이 아니라 예전이라면 네 맛도 내 맛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음식들에 자꾸 손이 간다. 재료 본질과 그 자체의 맛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너무 혹사시킨 내 혀와 위장에 사죄하고 싶을 정도다.
옷장도 크레용 컬러 옷이 검정·베이지 등 모노톤 옷들로 바뀌고 있다. 물론 아직도 원색 옷이나 빨간 립스틱에 손이 가기는 하지만 묘하게도 무채색 옷을 입을 때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러다 친구들이 나를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또 다른 변화는 사람도 자극적이고 개성이 강한 사람보다 덤덤한 매력이 있는 이들에게 끌린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탁구공을 튀기듯 서로 재치 있는 말을 하려고 경쟁했다. 언어유희를 통해 짜릿한 쾌감도 느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과 만나면 처음엔 흥미롭지만 금방 피곤해진다. 내 안의 색깔들과 에너지를 그 사람이 다 빼앗아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눌해 보이고 표정 변화도 풍부하지 않은 사람, 장식이 많은 중국풍 자기가 아니라 조선백자 같은 이들과 있으면 내 영혼의 빈 그릇이 채워지는 충족감이 든다. 화려한 컬러 사진을 보면 그 색깔에만 압도되지만 단순한 흑백사진을 보면 더 깊은 표정과 섬세한 내면이 전달되듯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려도 느껴지는 공감의 파장을 나누는 이들과 만나고 싶다.
담백하고 은은하게 늙어가고 싶다. 돋보이거나 인정받으려고 내 삶에 색조화장품이나 조미료를 더하고 싶지 않다. 번쩍이는 황금보다 은처럼 잔잔한 빛을 내고 수시로 닦아서 녹슬지 않는 노력을 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 은은하게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 소망이다. 혀도 닦고 마음도 수시로 조금씩 닦으면서 내 안의 은은함을 내가 누려야겠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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