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휴가 대신 쉼표 찍기

입력 : 2022-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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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국이라 몇년간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도 잘 가지 못했던 이들이 올여름에는 보복(?)이라도 하듯 여행을 떠나거나 서울의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긴다. 이즈음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어디를 다녀왔다’는 이야기고, 제일 자주 받는 질문이 ‘휴가는 다녀왔냐?’는 말이다.

7년 전 정년퇴직을 해서 휴가 날짜를 조정할 필요도 없고 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어 여름방학 기간에 멋진 추억을 남길 장소를 고민할 이유도 없는 나는 사람들에게 이에이치 클럽(EH CLUB), 즉 에브리데이 홀리데이(Everyday Holiday) 회원이라 하루하루가 휴가고 바캉스라고 답한다.

물론 나도 제주의 푸른 바다, 하와이의 야자수 그늘 혹은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느긋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고 싶다. 낯선 장소가 주는 설렘, 각 나라의 특색 있는 음식들, 무엇보다 골목골목의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면서 작은 기념품이라도 고르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과거엔 무릎이 흔들릴 때가 아니라 가슴이 흔들릴 때 여행을 가야 한다면서 정말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평상시보다 더 빡빡하게 일정을 짜고 한군데라도 더 보려고 발바닥에 쥐가 나도록 다니며 뿌듯해했다. 정작 돌아오면 어디를 다니고 무엇을 봤는지 잘 기억도 안 났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나를 쉬게 해주는 법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적절히 쉼표를 찍는다. 자연스럽게 공적인 일도 줄긴 했지만 사적인 약속도 너무 많이 만들지 않고 무엇보다 몸이 아닌 뇌가 쉬는 시간을 확보한다. 빈틈투성이인 사람이지만 내 일상에도 자주 빈틈을 만들려고 한다.

전에는 전원이 꺼지지 않는 고장 난 컴퓨터처럼 내 머리와 뇌는 세계 어느 곳을 가서도, 어느 시간에도 지치지도 않고 움직였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뉴욕 센트럴파크 벤치에 앉아서도 서울에 돌아가면 해결할 일로 머리를 채웠다. 지중해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대출금 이자 상환 날짜를 따졌다.

여전히 나는 걱정거리가 많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두차례 정도는 그런 생각을 덮고, 다른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끊고 순간에 집중하려 한다. 내 앞에 놓인 커피잔에, 모처럼 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에, 그리고 내 숨소리를 느낀다. 그 사소한 순간들이 내 머리와 뇌를 비워주는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빈둥빈둥, 멍 때리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멍 때리는 순간에는 마음에 멍이 들지는 않는다. 여유란 지갑이나 통장이 채워져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자유롭게 풀어줄 때 느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유난히 무덥다는 올여름, 바다나 산·계곡이 아닌 우리집 마당 의자에 앉아 나는 더위와 싸우는 대신에 더위에게 아부를 한다. 여름이니 당연히 더워야겠지만 그래도 종종 시원한 바람도 불어주고 곡식과 과일을 맛있게 익게 해줘 감사하다고 중얼거린다. 내 가족이나 지인들이 더위에 덜 고생하게 해달라고, 냉방병에 시달리지도 않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다. 내 삶에 자주 쉼표를 찍을 때 난 착해지는 것 같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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