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닛거리 구하려 자른 머리칼
노 진사 미쳐 날뛰게 만드는데
임 서방 마누라 도촌댁이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보따리 하나 들고 타박타박 내를 건너 장터로 향했다. 곧바로 방물가게로 들어가 보따리를 풀었다. 주인은 저울에 머리카락을 단 후에 돈 몇푼을 도촌댁 손에 쥐여주며 “걱정하지 말게. 한해가 지나면 또 비녀를 꽂을 수 있을 테니” 했다. 방물가게 주인의 위로에 도촌댁은 참고 참았던 설움이 터져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벽에 기대어 흐느꼈다.
장터 곡물가게로 가서 옥수수랑 좁쌀을 사 한자루를 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팔아서 사 온 양식이 두달도 못 가 떨어지자 도촌댁은 산비탈 화전밭뙈기 땅문서를 들고 노 진사네 집으로 갔다. 온갖 고생 끝에 처음으로 마련한 내 땅을 넘기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노 진사네 사랑방은 돈놀이 사무실이다. 전 재산인 한필지 밭을 잡히려니 부끄러워 남의 눈을 피해 어둑해진 밤에 찾아갔다.
“왜 임 서방이 안 오고 자네가 왔는가?”
노 진사의 물음에 도촌댁이 길게 한숨을 토하더니 “초근목피로 목숨만 이어가니 달포가 지나도 고뿔이 떨어지지를 않습니다요”라고 답했다.
한 식경이 지난 후 도촌댁이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누가 볼세라 노 진사네 사랑방을 나와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빡빡머리를 감춘 보자기가 벗겨지자 노 진사가 미쳐 날뛰던 일이 자꾸 생각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고쟁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아궁이 앞에 놓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고도 땅문서를 되돌려 받아왔다. 그는 두다리를 바짝 오므려 조였다. 아, 얼마 만이었던가. 아직도 그의 몸은 불덩이다.
이튿날 도촌댁은 장에 다녀와 푸짐한 저녁상을 차렸다. 큰 암탉 두마리에 수삼·대추·황기를 넣고 백숙을 한솥 끓였다. 콜록거리던 임 서방이 미친 듯이 닭다리를 뜯어 먹고 일곱살 쌍둥이 형제가 머리를 처박고 백숙을 먹는 걸 보고 임 서방 마누라는 마음이 편해졌다.
천석꾼 노 진사는 노랑이지만 여색(女色)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기생 머리도 얹어주고 소작농 유부녀 치마도 벗겨보고 집안 하녀들도 품어봤지만 도촌댁과의 그날 밤은 잊을 수가 없다. 노 진사에게 빡빡머리 여인은 도저히 범접하지 못할 부류다.
노 진사는 상사병에 걸려버렸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노 진사가 거간꾼을 통하자 도촌댁이 노 진사댁 찬모가 됐다. 매일 아침 노 진사댁으로 와 부엌에서 일하다가 저녁상을 차려주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보릿고개에 초근목피로 목숨만 이어가느라 누렇게 부황에 들떴던 임 서방네 식구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도촌댁도 얼굴이 반들거리고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몸져누워 있는 노 진사 안방마님 입맛 맞추랴, 노 진사를 위해 청포묵을 쒀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뿐인가. 때때로 노 진사가 옷고름을 당겼다. 짜릿짜릿한 그 짓도 자꾸 하다보니 도촌댁이 노 진사를 기다리게 됐다.
고뿔에서 풀려난 임 서방이 산비탈 밭뙈기 콩밭에 온 동네 뒷간을 퍼 똥지게로 나르는 걸 보다 못한 도촌댁이 노 진사에게 베갯머리송사를 해 임 서방을 노 진사네 행랑아범으로 들였다.
시름시름 앓던 노 진사네 안방마님도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 진사는 기뻐하며 행랑아범 안마발이라고 임 서방을 치켜세웠다. 안방마님도 매일 밤 임 서방의 지극정성 안마를 기다렸다. 자신의 몸이 꿈틀거리는 걸 느끼며 새로 태어난 듯 감격했다.
안방마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후덕한 안방마님은 도촌댁을 귀여워했고 노 진사는 임 서방을 고마워해 툭하면 대작을 했다.
안방마님이 지긋지긋한 지난 세월을 치를 떨며 떠올렸다. 끼가 넘친 노 진사가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를 쳐 그 뒷수습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저잣거리 왈패 마누라를 건드렸다가 칼을 들고 달려든 왈패에게 꿇어앉아 빌면서 논문서를 바치고, 어린 기생 머리 얹어주며 문전옥답 다섯마지기를 팔고, 이웃 문중 열녀 과부를 겁탈해 몽둥이찜질을 받고, 여승을 유혹하다가 옥살이를 했다.
그즈음 노 진사는 도촌댁 머리카락이 길 만하면 호통을 쳤다.
안방마님으로서는 도촌댁에 빠져 조용해진 요즘이 고맙기만 하다. 노 진사로서도 빡빡머리 도촌댁과 간통하는 것이 여승과 밀회를 즐기는 듯해 너무 좋아 혼자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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