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휩쓸고 지나가며
남자가 씨가 마른 선비촌에
굴뚝 청소부 들어오는데…
골목마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청아했던 황해도 구월산 자락 선비촌은 옛말이다. 선비촌은 썰렁하다. 낙엽이 이리저리 바람결 따라 쓸려 다니고 비쩍 마른 누렁이만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쭈그리고 누웠다. 선비가 글 읽는 소리는 고사하고 남자는 씨가 말랐다.
병자호란이 휩쓸고 지나가며 남자들은 징병으로 나가 전사하고 약삭빠른 선비는 징병관이 닥치기 전에 멀리 도망가버리고 그럼에도 남아 있던 남자는 청군에 잡혀 짐꾼으로 끌려갔다. 남은 사람은 여자뿐이다.
상강(霜降)이 지나며 날씨가 쌀쌀해졌다. 세월이 조용할 때 같으면 이때쯤 나무꾼을 데려다 장작을 패서 처마 밑에 쌓고 이 방 저 방 군불을 지펴서 앉는 곳마다 엉덩이가 녹을 텐데, 이제 과부만 사는 고을은 골목도 썰렁하고 이 방 저 방도 냉골이다. 뒤뜰의 대나무를 베고 어떤 과부는 하도 추워 매화나무를 베 군불을 지폈지만 설상가상 불길이 잘 들지 않았다. 굴뚝이 검댕에 막혀 불길이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굴뚝 뚫어. 굴뚝 뚫어∼.”
마을 어귀 유 진사네 과부가 굴뚝 청소부 깜상을 맨 먼저 낚아챘다. 대나무 대를 둘둘 말아 끝에는 대나무 뿌리 솔을 달아 굴뚝을 쑤시면 검댕이 잔뜩 묻어 나온다. 저녁나절이 됐을 때 굴뚝 청소를 끝낸 깜상이 처마 밑에 앉아 곰방대에 불을 붙이는데, 임 초시네 행랑아범 마누라가 나타나 깜상 소매를 당겼다.
임 초시네 부자와 행랑아범이 청군에 끌려가고 나자 임 초시네 서른여섯칸 기와집은 행랑아범 마누라 막실댁 혼자 지키고 있었다. 사랑방에 깜상을 모시고 저녁상을 차려주고 옆에 착 달라붙어 앉은 막실댁이 임 초시가 광 속에 깊숙이 감춰뒀던 매실주를 따라줬다. 널름널름 받아 마신 깜상이 막실댁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막실댁 굴뚝은 막히지 않았는가?” 했다. 막실댁이 눈을 흘기며 깜상 허벅지를 꼬집었다. 바람기가 다분한 막실댁이 평소에도 늙은 행랑아범 눈을 피해 임 초시와 통정을 하던 터라 청군도 반겼고 깜상도 가만두지 않았다.
굴뚝 청소부 깜상이 밤일을 한 집이 막실댁 하나만은 아니다. 청군이 휩쓸고 지나가 기왕 화냥년 소리를 듣는 판국에 깜상이면 어떻고 도둑이면 어떠랴. 온 동네 굴뚝을 쑤셔놓고 깜상은 떠나갔다.
보름쯤 지나 당나귀 두마리를 몰고 깜상이 선비촌에 나타났다. 굴뚝 청소값으로 곡식을 받아 자루를 당나귀 등에 싣고 돌아갈 요량으로 왔는데 선뜻 곡식을 내놓는 집이 없다. 막실댁하고는 삿대질을 하며 싸움이 붙었다.
“굴뚝 청소를 해줬으면 청소값을 내놔야 할 것 아니야? 굴뚝 청소를 어디 한군데만 해줬나.”
깜상의 말에 피식 웃던 막실댁이 “그것도 쑤시개라고 달고 다니냐” 쏘아붙이곤 “허구한 날 축 늘어져 힘 한번 못 쓰는 물건 가지고”라고 비아냥댔다.
당나귀 두마리를 세를 주고 몰고 왔건만 어느 한집 곡식 자루를 내놓는 곳이 없어 깜상은 뿔이 났다. 결국 관아에 고발해 동헌 마당 사또 앞에 섰다. 굴뚝 청소부 깜상과 맞설, 선비촌 대표 선수로 막실댁이 나섰다. 막실댁을 하대하며 업신여기던 안방마님들은 장옷을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감추고 속속 동헌에 모여 구경꾼 속에 섞였다.
“싸움거리가 무엇인고” 묻는 사또의 일성에 “소생의 직업은 굴뚝 청소부입니다” 하고 답한 깜상이 “선비촌에서는 굴뚝 청소를 다 해줬건만 청소비를 내지 않습니다요”라고 일러바쳤다.
막실댁이 나섰다.
“저 새카만 사람은 겉만 검은 게 아니라 속마음도 시커멓네요. 저이는 굴뚝 청소가 부업이고 주업은 공방에 검정을 파는 검정 장수입니다.”
빙 둘러선 구경꾼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막실댁이 말을 이었다.
“송연(松煙) 먹 중에서도 최상급 먹인 홍송연 먹 재료인 홍송연 검정은 선비촌 굴뚝 속에서만 나옵니다.”
사또가 놀라고 구경꾼이 놀라고 깜상도 놀랐다. 이방이 송연 먹공방 주인을 불렀다. 사또가 치부책 재료비 지출란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막실댁이 또 한번 일갈했다.
“저 인간이 방에도 굴뚝 청소를 해줬다고 우기는데 쇤네는 해우값을 받아야겠습니다.”
하하하. 동헌이 뒤집어졌다.
“깜상은 택일하라. 곤장 백대를 맞을 텐가, 아니면 마을 집집마다 참나무 장작 스무지게씩 쌓아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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