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브라질간 월드컵 축구 대결이 있었던 날 새벽,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화문 광장으로 거리 응원을 나온 사람들 모습을 보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하던 2002년 6월의 열기였고, 또 하나는 벌써 20년이 흘렀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날마다 열심히 살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크고 작은 일에 애쓰느라 시간이 휙휙 앞질러 가는 걸 미처 눈치 채지 못하다가 달력이 12월로 넘어가서야 비로소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한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버렸지 뭐예요.”
2002년 6월 광화문 광장에 세워졌던 거인 조각도 올해 스무해를 맞았다. 미국의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1942년생)가 만든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목을 굽힌 거인은 한손으로 망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키네틱아트(Kinetic art·움직이는 미술품)다. 이 작품은 크기를 다르게 하여 시애틀과 프랑크푸르트 등 총 11개 도시에 세워졌는데, 그중에서 서울에 있는 것이 키 22m에 무게 50t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누구인지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인 이 거인은 역사적 위인이나 영웅을 기린 동상이 높은 받침대 위에 모셔져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고된 망치질을 하며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다져가는 것이 평범한 우리와 닮았다. 틀림없이 그도 20년이 어느새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것이다.
맨 처음 이 조형물이 건물 앞 거리에 등장했던 2002년 당시만 해도 대중은 이런 형태의 공공작품에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덩치 큰 시커먼 거인이 머리 위에서 망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보고 위협적이라고 느낀 듯 멀찌감치 돌아가는 행인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 이 작품은 건물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도록 한차례 옮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차츰 외국 작가의 현대미술품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됐다. 심지어는 작품 속 인물이 성실하게 일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기 옆자리 동료 같다는 공감까지 얻으며 거인은 다시 거리에 가깝게 놓이게 됐다.
보로프스키는 어느 구두 수선공이 일하는 사진과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 본 마음씨 착한 거인의 인상을 합쳐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광화문 지점에서 일하는 구두 수선공 거인은 휴일과 공휴일에는 망치질을 쉬는 주 5일 근로자이다. 눈이 오는 어느 해 겨울날에 마냥 눈을 맞고 서 있는 근로자 거인을 보고 누군가 빨간 털모자를 씌워주자고 제안했다.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부츠를 신은 산타클로스 거인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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