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11일 오전 12시20분(한국시각) 카타르 도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선 중국의 WTO 가입을 의결했다. 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단 40여명과 기자단 70여명은 축제 분위기였다. 중국 기자단은 하루 종일 식사도 거른 채 취재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로써 중국은 WTO의 143번째 정식 회원국이 됐다. 지구촌으로 확산되던 이른바 ‘세계화’ 물결이 절정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미국 도움으로 가능했다. 물밑 작업을 도운 빌 클린턴 대통령과 공화당·월가의 합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미국 주도의 세계화는 1991년을 출발점으로 본다. 1991년은 소련이 붕괴된 해이자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터진 해다. 가장 강력했던 정치적·경제적 라이벌이 동시에 자멸하면서 미국은 세계의 원톱(One Top)이 된다.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구호 아래 세계 경찰을 자임하고 나선다.
미국의 세계화는 어쩌면 자국 경제 상황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 경제 최전성기는 1960년대였다. 1973년 오일 파동 등을 거치며 1980년대까지 미국은 경기 침체에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면서 ‘임금 없는 성장’이란 용어가 회자됐다.
세계화는 한마디로 국경을 가리지 않고 상품을 싸게 공급받겠다는 뜻이다.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물가상승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동력을 찾으려 했다. 실제 미국은 세계화를 추진하는 동안 자국 관세를 스스로 철폐하며 중국 제품을 비롯해 값싼 외국산 상품을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는 180도 다른 상황을 맞고 있다.
학자에 따라 ‘세계화 종말’ ‘세계화 변곡점’ ‘탈세계화’ 등으로 달리 표현하지만 미국이 더이상 세계화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은 동일하다.
미국 내에서 세계화는 이미 실패한 전략으로 치부된다. 세계화의 과실을 중국이 가져갔다는 생각 때문이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중국은 WTO 가입 이후 20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2001년 11조위안에 그쳤던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 100조위안을 돌파하며 미국을 위협하는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상품무역 규모는 이미 미국을 제친 1위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세계화 전략이 중국이라는 새끼 호랑이를 키워준 꼴이다. 세계화 실패 증거는 미국 내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가안정 전략은 단기적인 효과는 거뒀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자국 산업 경쟁력을 약화했다. 또 안방시장을 내준 와중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하며 중산층이 붕괴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는 2016년 ‘미국 우선주의’ ‘자국 보호주의’를 앞세워 백인 중산층 지지를 얻은 트럼프 대통령 등장으로 연결된다.
미국의 변화에 더해 최근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화 종말을 앞당기는 방아쇠가 됐다. 전세계 나라들은 세계화의 열차에서 앞다퉈 하차, 자국의 에너지·식량 안보를 위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자. 우리 정부가 현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면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고민의 흔적이 희미해서다. 물가상승을 이유로 관세장벽을 스스로 낮춰 농축산물을 들여오는 모습에선 우려가 더욱 커진다. 현 정부 임기 내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지금이라도 국제 정세를 살펴 에너지·식량 안보를 튼튼히 할 방안을 고민하고 우리 경제를 역동적으로 성장시킬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한재희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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