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에서] 위기의 만성화(慢性化) 시대

입력 : 2022-03-30 00:00

01010101901.20220330.900046040.05.jpg

가끔 주말에 라면을 먹게 된다. 평일은 첫새벽에도 늘 밥을 챙기지만 주말엔 게으름인지 느긋함인지 한끼 정도는 인스턴트 라면에도 관대해진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라면 소비량은 75.7개로, 일주일에 1개 이상 라면을 먹는 셈이니 적지 않은 양이다.

이 라면을 두고 최근 말들이 많다. 가격 논란이다. 업체들이 지난해 이미 한차례 가격을 올린 바 있는데,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곡물 가격이 치솟자 다시 가격인상을 하니 마니 옥신각신 언쟁 중인 모양이다. 급기야 소비자단체들까지 가세했다.

업계 가격인상 자제와 밀 가격 안정화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도 냈다. 더 나아가 다시는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밀을 비롯한 주요 곡물의 자급기반 확대에 나설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파장이 돌고 돌아 우리나라 식량 자급기반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까지 불러일으킨 상황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사실 국제곡물 수급불안으로 인한 식료품 가격폭등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의 속출로 곡물 수급불안과 식량위기가 상존하는 시대가 됐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도 심각한 식량위기가 두차례나 있었다. 전세계가 애그플레이션(농산물발 물가상승) 공포에 휩싸였던 2006∼2008년과, ‘아랍의 봄’을 촉발한 2011∼2012년의 식량위기 사태다. 당시 우리나라도 큰 충격에 휘청거렸다. 허둥대는 정부에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고, 빈약한 식량 자급률에 대한 자성론도 들끓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잘못됐다. 절대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타성에 젖어 밖에서 먼저 답을 찾으려 덤벼들었다. MB정부 시절 식량위기 대응 핵심과제로 기획된 ‘국가곡물조달시스템’이 그 예다. 해외시장에 대한 충분한 준비 없이 성급하게 발부터 담근 결과 사업은 얼마 못 가 고꾸라졌다. 해외에 광활한 농지를 개발해 곡물을 대량 생산하고 비상시 국내로 들여와 활용한다는 ‘해외농업개발’ 사업 역시 최근 곡물수출규제 변수에 발목이 잡혀 실효성에 커다란 의문부호가 달렸다. 혹독한 식량위기 사태를 그것도 두번이나 겪으면서 범정부 합동 민관 핵심과제로 추진한 대책이 정작 위기가 닥쳐도 작동하지 않는 고장난 시스템으로 전락한 것이 지금의 실상이다.

그렇게 밖에서 헤매는 사이 집안 꼴은 엉망이 돼 버렸다. 식량자급률은 2006년 52.7%에서 2020년 45.8%로, 곡물자급률은 같은 기간 27.7%에서 20.2%로 주저앉았다. 곡물자급률은 역대 최저치다. 위기의 정점에 있는 밀 자급률은 고작 0.8%다. 이쯤되면 식량위기와 자급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자성론이 위기 때만 잠시 반짝하다 사라지는 일회성 화제 정도로 소비돼온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긴 식량생산의 근간인 농지가 매년 1만6000ha씩 개발수요에 뒤덮여 사라져도 먼 산 불 보듯 하는 현실에서 더 말해 뭐하겠는가. 부족하다 싶으면 외국산 농산물에 저율관세할당(TRQ)을 매겨 마구 수입해 들이붓듯 퍼붓는데 뭔들 버텨낼까 싶다. 우리가 뼈아픈 ‘위기’를 그리 경험하고도 또다시 ‘위기’가 터지면 허둥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식량위기 만성화에 대한 해법은 내부로부터 찾아야 한다. 수급불안 변수가 상수로 치환되고 ‘자국 우선주의’가 갈수록 강화되는 엄혹한 현실에서 식량자급률 제고 노력 없이는 또다시 헛된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새 정부 출범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통령 당선인은 공약 리스트에서 ‘식량주권’을 수차례 강조했다. 과거 역대 정부마다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외쳤지만 오히려 뒷걸음만 했다. 이젠 만성적인 식량위기로부터 벗어날 때가 됐다. 관건은 강력한 ‘실행’에 달렸다. 머뭇거릴 시간 없다.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 어물쩍 한눈팔다간 5년 훅 지나간다.

이경석 (전국사회부장)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게시판 관리기준?
게시판 관리기준?
비방, 욕설, 광고글이나 허위 또는 저속한 내용 등은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되거나 댓글 작성이 금지될 수 있습니다.
농민신문 및 소셜계정으로 댓글을 작성하세요.
0 /200자 등록하기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최신기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