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배추도, 우리도 다 죽게 생겼어요”…문드러지는 농심

입력 : 2022-12-15 18:30

[현장] 김장배추 산지거래 끊긴 전남 해남 가보니

상인들 한달 넘게 발길 끊겨

수확 못해 썩고 상품성 저하

갈아엎어도 생산비 못 건져

농가들, 산지폐기·시장격리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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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 이후 배추값이 폭락하면서 전남 해남·진도 등지에서 산지거래가 실종돼 농가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해남의 한 배추밭에서 배추재배 농가들이 수확시기를 놓쳐 끝이 누렇게 썩기 시작한 배추(네모 안)를 보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이러다 배추농가들 다 죽게 생겼습니다. 폐기든 시장격리든 대책이 당장 필요합니다.”

김장철 이후 배추값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전남지역의 배추 산지거래가 마비되다시피한 상태에 처했다. 포전거래 계약을 맺은 상인들이 배추 수확을 포기한 채 자취를 감추는가 하면 장기 거래를 해온 김치공장들도 발길을 끊으면서 수확작업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뾰족한 대책없이 시간만 흐르는 사이 배추는 과숙돼 밭에서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농가 피해만 커지고 있다.


◆밭에서 썩기 시작한 가을배추=산지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해남, 진도 등 배추 주산지에서는 수확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강원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수확한 가을배추 재고가 여전히 많아 배추를 사겠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추값이 폭락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작업을 해서 시장에 내봤자 작업비도 못건지고 손해를 봐야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산지유통인들도 아예 작업을 포기한 상태다.

김철규 해남 문내농협 조합장은 “가락시장 공식 가격이 10㎏ 상품 한망에 3000원 안팎이라지만 농가들이 가락시장에 배추를 출하하면 대부분 한망에 1500원 정도 밖에 못 받는다”면서 “생산비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을 받기 위해 배추를 출하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출하가 멈추면서 11월 중순에 마무리됐어야 할 가을배추 수확이 12월 중순이 넘도록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작기를 한달 이상 넘긴 배추들은 몸집은 커지고 속잎은 꼬이는 등 상품성을 잃어가더니 급기야 속잎이 위로 솟고 누렇게 썩어들어가 더는 판매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배추농가 김형태씨(77·전남 해남)은 “정상적이라면 겉잎이 전체를 싸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속잎들이 겉잎을 뚫고 위로 솟아올라서 썩기 시작했다”면서 “조금 더 있으면 꽃대도 올라올거라 이제는 쌈배추용으로도 팔 수 없을만큼 망가졌다”고 말했다.


◆포전계약 상인들 연락두절…피해는 고스란히 농가 몫=농가들은 포전거래 계약을 맺은 상인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해남, 진도 등 전남 지역의 배추농가들은 대부분 상인들과 포전거래 계약을 먼저 맺은 뒤 배추값 중 일부를 계약금으로 받고 배추 재배를 시작한다. 종자와 비닐값은 상인이 부담하고 농가는 정식과 물관리를 담당한다. 출하 때가 되면 상인이 배추를 수확해 출하하고, 농가에 나머지 배추값을 지불하는데 올해는 출하시기가 다 지나도록 작업을 하기는 커녕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산지 관계자는 “김장철이 시작되는 한달 반쯤 전부터 상인에게 계속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며 “나뿐 아니라 상인과 계약한 농가들 대부분이 상인들과 연락이 안되서 배추값을 받기는 커녕 배추 처리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인들이 연락두절인 상황이 길어지는 동안 배추는 밭에서 자라다 못해 썩어들어갈 지경이다. 농가들이 배추값의 일부를 계약금으로 받은 상태여서 상인들과의 협의 없이 배추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남에서 배추 농사를 짓는 강병구씨(57)는 “지난 8월에 상인과 가을배추 2만3000평을 계약했는데 상인이 연락두절되면서 단 한포기도 수확을 못하고 다 밭에서 썩고 있다”면서 “이제는 결국 갈아엎는 수 밖에 없는데 남은 배추값을 받기는 커녕 내 생돈만 1000만원 넘게 들어가게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속한 산지폐기 절실 한목소리=농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산지폐기나 시장격리 같은 극단의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산지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겨울배추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아직 밭에 있는 가을배추를 하루라도 빨리 시장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경채 해남 황산농협 조합장은 “배추 수확작업도 안되고 산지거래도 거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농가들이 최소한 생산비라도 건질 수 있도록, 겨울배추라도 산지거래가 살아날 수 있도록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겨울배추생산자연합회(회장 서정원·화원농협 조합장)는 15일 해남 화원농협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농식품부와 전라남도, 해남·진도 등 겨울배추 주산지 시군에 산지폐기 등 대책 마련을 촉구키로 결의했다.

서정원 회장은 “배추농가들이 올 겨울에 피해를 많이 입으면 내년 봄에 봄배추 농사를 못 지을 수도 있다”면서 “농가들이 배추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도록 농식품부와 지자체가 함께 조속히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남=이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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